[이덕일의 ‘역사의 창’] 조선의 사헌부와 대한민국 검찰
2024년 12월 04일(수) 22:00 가가
지금의 대한민국 검찰과 비슷한 조선의 사법기관은 사헌부(司憲府)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선은 사헌부는 물론 의금부, 형조, 한성부 등 여러 기관에 수사권을 주었다. 여러 기관에 수사권을 부여한 이유는 한 부처의 전횡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한 수사기관의 수사가 미흡할 경우 바로 다른 수사기관에 사건을 맡겼다.
성종 1년(1470년) 7월 부상(富商) 김득부(金得富)가 대신 김정광(金廷光)에게 뇌물을 준 사건이 발생했다. 세조 때의 적개공신 김국광의 동생 김정광에 대한 의금부의 수사는 미진했다. 승정원에서 봐주기 수사에 대한 비난 여론을 전하자 성종은 의금부 수사관을 사헌부에 구속했고, 사헌부가 수사에 나서자 다급해진 의금부는 김정광이 그간 수뢰한 뇌물명목을 모두 적시하며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성종은 사형 대신 장(杖) 1백 대에 먼 변방의 종으로 삼고, 장안(贓案)에 기록하게 했다. 뇌물을 받은 관리들의 명단인 장안에 오르면 본인은 물론 자손들까지 모두 벼슬길이 막혔다. 세조 때의 공신집안도 수사망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은 지금의 차관급인 종2품에 지나지 않지만 그 위세는 정1품에 뒤지지 않았다. 백관에 대한 탄핵권과 수사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막강한 권한의 사헌부는 내부 위계가 엄격했다. ‘연려실기술’ ‘관직전고(官職典故)’는 “지평(持平:정5품)은 뜰에 내려가서 장령(掌令:정4품)을 맞았고, 장령은 집의(集義:종3품)를 또 그와 같이 맞았으며, 집의 이하는 모두 내려가서 대사헌을 맞는 것이 상례(常例)였다”고 전하고 있다. 내부 위계질서는 엄격했지만 업무는 민주적, 수평적으로 처리했다. 사헌부는 다시(茶時)와 재좌(齋坐)라는 회의를 열어서 다례(茶禮)를 행하면서 업무를 협의해 처리했다.
사헌부가 나라사람들의 신망을 산 이유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추상같았기 때문이다. 수장인 대사헌일지라도 문제가 있으면 즉각 탄핵하고 나섰다. 명종 16년(1561년) 4월 사헌부는 “대사헌 송기수(宋麒壽)가 상소를 올릴 때 거론해야 할 장본인이 있는 줄 알면서도 거론하지 않았다”면서 파직을 요청했다. ‘거론해야 할 장본인’은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 ‘이량(李樑)’과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었다. 명종 때 ‘이량·윤원형·심통원’은 모두 왕실의 처가 인사들로서 전횡을 자행해 ‘삼흉(三凶)’으로 지목되었는데, 대사헌 송기수가 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이름을 거명해 탄핵하지 않았으니 파직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앞의 ‘연려실기술’ ‘관직전고’는 사헌부 관원이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관료가 떨고 두려워한다”고 전하는데, 종2품 관청으로서 백관을 떨게 하는 권위는 이런 자기 검열에서 생긴 것이다. 사헌부 정6품 감찰(監察)에 대해서는 “남루한 옷에 좋지 않은 말과 찢어진 안장, 짧은 사모에 해진 띠를 착용한다”고 전한다.
사법기관의 진정한 권위는 조선의 사헌부처럼 고위직일수록 더욱 엄격하게 수사하고 자신에게 더욱 가혹한 도덕성을 갖추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조선의 사헌부는 정의 실현을 지체하지도 않았고, 한쪽만 심판하는 편향된 수사를 정의라고 호도하지도 않았다.
대통령 선거는 일단 끝나면 승자는 선거기간의 모든 고소고발을 취하하는 것이 관례였다. 패자가 부정선거라고 반발한 적은 있었지만 승자가 자신 휘하의 검찰을 시켜서 패자는 물론 그 부인까지 겨냥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가장 큰 정치적 의무는 사회통합이고, 그 사회통합의 첫걸음은 패자를 포용함으로써 패자를 찍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었다.
일부 검사장 탄핵에 대해 법무부장관과 검찰이 대거 나서서 반발하지만 여론은 싸늘하다. 검찰의 권위를 스스로 추락시킨 장본인은 야당이 아니라 검찰 자신이다. 만약 대선의 승패가 바뀌었어도 검찰이 지금처럼 할 수 있겠는가를 자문해보면 답은 자명하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앞의 ‘연려실기술’ ‘관직전고’는 사헌부 관원이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관료가 떨고 두려워한다”고 전하는데, 종2품 관청으로서 백관을 떨게 하는 권위는 이런 자기 검열에서 생긴 것이다. 사헌부 정6품 감찰(監察)에 대해서는 “남루한 옷에 좋지 않은 말과 찢어진 안장, 짧은 사모에 해진 띠를 착용한다”고 전한다.
사법기관의 진정한 권위는 조선의 사헌부처럼 고위직일수록 더욱 엄격하게 수사하고 자신에게 더욱 가혹한 도덕성을 갖추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조선의 사헌부는 정의 실현을 지체하지도 않았고, 한쪽만 심판하는 편향된 수사를 정의라고 호도하지도 않았다.
대통령 선거는 일단 끝나면 승자는 선거기간의 모든 고소고발을 취하하는 것이 관례였다. 패자가 부정선거라고 반발한 적은 있었지만 승자가 자신 휘하의 검찰을 시켜서 패자는 물론 그 부인까지 겨냥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가장 큰 정치적 의무는 사회통합이고, 그 사회통합의 첫걸음은 패자를 포용함으로써 패자를 찍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었다.
일부 검사장 탄핵에 대해 법무부장관과 검찰이 대거 나서서 반발하지만 여론은 싸늘하다. 검찰의 권위를 스스로 추락시킨 장본인은 야당이 아니라 검찰 자신이다. 만약 대선의 승패가 바뀌었어도 검찰이 지금처럼 할 수 있겠는가를 자문해보면 답은 자명하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