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주황빛 단풍, 담양 메타세쿼이아길
2024년 11월 21일(목) 00:00
우리나라에서 나무가 가장 주목받는 계절이 있다면, 그 시기는 가을일 것이다. 사람들은 다채로운 단풍색을 만끽하기 위해 나무를 찾고, 보고, 감각하고,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어떤 나무의 단풍을 제일 좋아하세요?” 얼마 전 만난 지인으로부터 받은 질문이다. 나는 곧바로 답했다. “그냥 다채로운 단풍잎의 조화가 감탄스러울 뿐,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선호하는 단풍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곤 돌아서서 생각했다. ‘혹시 나도 모르게 내가 특별히 좋아했던 단풍색이 있던가?’

이튿날 아침 작업실 근처 광릉숲을 걷다 길게 늘어선 침엽수림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문득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단풍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눈앞에 늘어선 메타세쿼이아의 단풍이었다.

오래전 우리나라의 구과식물을 그리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우리나라 산림의 반을 이루는 소나무, 전나무, 비자나무 등의 바늘잎나무를 관찰한 적이 있다. 구과식물 중 대다수는 바늘잎나무이고, 이들은 겨울에도 녹색의 잎을 내보인다. 연구실 동료들은 대다수의 식물이 동면하는 겨울에 조사, 채집 출장을 가지 않았지만 구과식물을 그리는 나는 겨우내 분주했다.

물론 바늘잎나무 중에는 가지에 잎이 없는 상태로 겨울을 나는 종도 있었다. 메타세쿼이아와 낙우송, 일본잎갈나무 등은 가을에 낙엽이 지고, 가지에 잎이 없는 상태로 겨울을 나는 낙엽침엽수다.

이들이 가을에 낙엽을 떨구는 데엔 여러 장점이 있다. 겨우내 체내 수분과 영양소를 아낄 수 있고, 눈과 얼음에 의한 손상을 최소화할 수도 있다. 땅에 떨어진 낙엽은 쌓이고 분해되며 토양에 유기물과 영양소를 제공한다. 그리고 겨우내 동물들의 서식지가 되어주기도 한다.

동시에 이들은 지구에서 가장 오래도록 생존해온 나무다. 이들이 겨울을 나는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존재 자체로 증명하고 있다.

메타세쿼이아는 흔히 되살아난 나무,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공룡이 살던 시대에 존재했던 이 나무는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에서 멸종된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1944년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노목으로 다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메타세쿼이아는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자라는 속도가 빠르고, 수고가 높고, 물가에서도 잘 사는 이 나무를 인간은 가만히 둘리 없었다. 메타세쿼이아는 1952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후,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도시 가로수와 공원 조경수로 널리 식재되었다.

담양 메타세쿼이아길은 1972년 조성되기 시작했다. 국도 24호선, 군청~금성면 원율삼거리 구간에 5년생 나무 약 1300그루를 식재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제정 여건상 가로수길을 조성하는 군비를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결국 나무를 심고 가꾸는 선택을 피할 수 없었다. 덕분에 50년이 지난 지금, 약 8.5km 길이의 도로를 가운데 두고 높이 30m의 메타세쿼이아 2000여 그루가 양쪽으로 줄지어 서있는 풍경이 되었다.

오래전 고속도로 개발계획이 발표되고, 이 길이 사라질 위험에 처한 적이 있으나,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도로가 비켜났다고 한다. 주민들에게 그만큼 중요한 장소인 셈이다.

봄이면 길의 나무들은 주민들에게 시원한 숲향을 내어주는 산책로가 되고, 여름에는 귀한 그늘이 되어준다. 가을에는 주황빛으로 물든 단풍 길이 된다. 바로 지금 메타세쿼이아길에 주황빛 햇살이 내리쬐고 있다. 바늘잎은 넓은잎(활엽)과 달리 잎 사이로 햇빛이 촘촘히 새어 나오고, 햇빛은 바닥에 주황빛 그림자를 선사한다.

십여 년 전 이맘때 담양 메타세쿼이아길에서 본 아름다운 단풍 풍경을 잊지 못해 그 후로 두어 번 그곳을 들렀지만, 이전에 내가 본 선명한 주황빛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자연 풍경은 매 순간 다르다. 계절이 같고, 날짜가 같을지라도. ‘오로지 이 순간뿐’이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자연을 감각해야 한다.

식물은 내게 포용력을 길러준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좋아하게 만든다. 식물을 공부하기 전까지 나는 딱히 주황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을 빛에 익어가는 감나무와 꽈리의 열매, 금목서의 꽃 그리고 메타세쿼이아의 단풍을 마주한 후로 나는 주황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식물을 공부한다는 것은, 날이 갈수록 좋아하는 게 느는 나를 마주하는 일이다.

<식물 세밀화가>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