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기억 - 오광록 서울취재본부 부장
2024년 11월 14일(목) 22:30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의 베벨 광장에는 독특한 지하공간이 있다. 가로·세로 1m 정도의 유리 바닥이 놓여있고, 그 아래 지하 공간에는 작은 도서관이 조성돼 있다. 이 도서관 책장에는 책이 없다.

과거 독일은 ‘광기의 시대’를 거치며 책을 불태웠다. 나치를 지지하는 극우 대학생들이 횃불과 장작더미를 들고 에밀 졸라, 프란츠 카프카,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토마스 만 등 수많은 작가의 책 2만권을 불태웠다. 이날 밤 옛 지성은 잿더미로 사라졌다.

이 지하 도서관은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공간이며 ‘책을 태우는 자는 사람도 태우게 된다’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경고가 작은 글씨체로 쓰여져 있다. 이 도서관은 책과 인간을 불태웠던 독일의 과거를 가장 효과적이고 뼈아프게 ‘기억’하는 곳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가 현재에서 완전히 지워진 과거의 일이 아니며, ‘우리의 발 밑’ 공간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느끼기에도 충분한 힘이 있는 곳이다. 베를린 의회 건물의 추모비도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의 공간’이다. 나치가 살해한 96명의 독일 국회의원을 상징하는 각각의 96개 판을 어른 무릎 높이 정도의 크기로 만들었다. 삼각형 형태의 각 판에는 숨진 국회의원의 출생지와 출생연도 등이 기록돼 있는데,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름을 확인하는 것도 어렵다. 정치적 신념을 꺾지 않고, 목숨을 내놓았던 정치인을 기억하는 추모비로는 의외로 규모가 너무 작다.

하지만 이 추모비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각각의 판이 하나의 산처럼 보인다. 베를린 주변에는 산이 없다. 그래서 작은 규모이지만 희생된 의원들의 추모비는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각각의 산이 어우러져 거대한 산맥을 이루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광주·전남 지자체들이 앞다퉈 관련 기념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기억이 꼭 거대할 필요가 있을까. ‘한강의 기적’을 작가가 원하는 적절한 형태와 규모로 기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kro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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