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 정민 조선대 중국어문화학과 2년
2024년 10월 14일(월) 22:00 가가
과거 베이비붐이라며 산아를 제한하던 정책들은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정책이 됐다. 이웃 나라인 일본은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지 오래이며 우리나라 또한 멀지 않았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저출생과 맞물린 수명의 증가로 인해 2072년이면 우리나라 인구 2명 중 1명은 노인일 것이라는 내용도 발표됐다.
고령화 사회가 돼 가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사회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령화 사회에서 벌어지는 노인 혐오 또한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최근 들어 노인 혐오를 조장하는 단어들이 많이 생겨났고, 그 단어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도 모른 채 비일비재하게 쓰이고 있다.
노인의 틀니를 비하적으로 이르며 파생된 ‘틀딱’이라는 단어는 현재 노인을 넘어 고지식하고 과하게 보수적인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노인 혐오에 있어 얼마나 무딘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최근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딸피’라는 단어로 노인을 지칭하기도 한다. 딸피란 처음 생겨난 단어가 아닌 그 의미가 퇴색된 단어다. 본래 게임 중 HP가 거의 없는 상황을 이르는 말이지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노인을 비하적으로 이르는 말이 됐다.
“마을의 노인 하나가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과 달리 과거 노인은 지혜의 상징이었다. 청년들에게 닥쳐올 문제를 이미 헤쳐왔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의 변화란 숨이 찰 만큼 빠르고, 이 순간에도 새로운 기술들이 계속해서 발명되고 있으며 굳이 어른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아도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인터넷이 있다. 어쩌면 그들이 존경받아 온 이유를 반쯤은 기술에 뺏겨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살아온 배경과 상황, 당시의 교육과정 등 많은 것이 변했기에 세대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가끔 다섯 살 아래인 동생으로부터도 세대 차이를 느끼곤 한다. 그렇기에 훨씬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하는 노년층과 원만히 의견을 맞춰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종종 “나 때는 말이야”로 말의 물꼬를 트는 그들이 답답하기도,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며 반발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의 20대와 우리의 20대는 같은 시간의 밀도를 가졌다. 대학을 졸업할 때 쯤 취직을 고민했을 것이고, 내가 선택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끝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 나이대에 하는 고민이란 비슷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때가 아닐까.
‘어른답지 못한 어른’에 대해서는 논외가 되겠지만, 우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일궈놓은 그들을 분명 존중하고, 존경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시곗바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오른쪽을 향해 달린다. 선택의 여지 없이 누구나 늙는다. 내가 바라보는 그들이 미래의 나라는 생각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심화한 세대 갈등은 혐오라는 장벽을 쌓았고, 장벽은 곧 그들을 가두는 울타리인 소외가 됐다. 삶의 연륜을 쌓은 끝에 결국 도달할 곳이 장벽 앞이라는 것을 아는 나는, 빛바랜 청춘의 안식처가 울타리 안이라는 것을 아는 너는, 마음 편히 시간에 자신을 맡길 수 있겠는가. 왜 우린 ‘나’를 투영해야만 그들에게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는 건지 안타까울 뿐이다.
무조건적인 혐오로 소외된 그들이 더욱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해 나가야 함이 분명하다. 그런 사회를 만들어 낸 우리라면 허송세월이 아닌 깊은 시간의 밀도를 지닌 ‘하나의 도서관’과 같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의 틀니를 비하적으로 이르며 파생된 ‘틀딱’이라는 단어는 현재 노인을 넘어 고지식하고 과하게 보수적인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노인 혐오에 있어 얼마나 무딘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살아온 배경과 상황, 당시의 교육과정 등 많은 것이 변했기에 세대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가끔 다섯 살 아래인 동생으로부터도 세대 차이를 느끼곤 한다. 그렇기에 훨씬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하는 노년층과 원만히 의견을 맞춰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종종 “나 때는 말이야”로 말의 물꼬를 트는 그들이 답답하기도,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며 반발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의 20대와 우리의 20대는 같은 시간의 밀도를 가졌다. 대학을 졸업할 때 쯤 취직을 고민했을 것이고, 내가 선택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끝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 나이대에 하는 고민이란 비슷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때가 아닐까.
‘어른답지 못한 어른’에 대해서는 논외가 되겠지만, 우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일궈놓은 그들을 분명 존중하고, 존경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시곗바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오른쪽을 향해 달린다. 선택의 여지 없이 누구나 늙는다. 내가 바라보는 그들이 미래의 나라는 생각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심화한 세대 갈등은 혐오라는 장벽을 쌓았고, 장벽은 곧 그들을 가두는 울타리인 소외가 됐다. 삶의 연륜을 쌓은 끝에 결국 도달할 곳이 장벽 앞이라는 것을 아는 나는, 빛바랜 청춘의 안식처가 울타리 안이라는 것을 아는 너는, 마음 편히 시간에 자신을 맡길 수 있겠는가. 왜 우린 ‘나’를 투영해야만 그들에게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는 건지 안타까울 뿐이다.
무조건적인 혐오로 소외된 그들이 더욱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해 나가야 함이 분명하다. 그런 사회를 만들어 낸 우리라면 허송세월이 아닌 깊은 시간의 밀도를 지닌 ‘하나의 도서관’과 같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