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과 함께 걸어온 ‘예향’ 40년 여정 - 송기동 예향부장·편집국 부국장
2024년 10월 02일(수) 00:00 가가
#“오곡이 알찬 열매를 맺어가는 가을 문턱에서 우리들의 오랜 숙원이던 꿈이 하나 영글었습니다. 그동안 ‘예술의 고장’임을 자처해온 우리들에게 그러한 긍지를 가꾸고 또 일구어 나갈 마땅한 ‘자리’ 하나가 없었음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광주일보는 우리 모두의 이런 목마름을 씻어주고 또 우리의 다정한 인간정신을 더불어 살려나가기 위한 갈망에 부응하고자 ‘전라도 사람의 잡지’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광주일보 자매지(誌)인 월간 ‘예향’이 창간 40주년을 맞았다. 창간사에서 밝힌 대로 1984년 10월, ‘전라도의 멋과 얼을 지켜나갈 전라도 사람들의 잡지’를 표방하며 첫 발을 내딛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인 2002년 2월호를 끝으로 잠정 발행 중단했다가 11년 2개월 만에 ‘문화예술 종합 교양지’에서 ‘문화예술 전문 매거진’으로 변화하여 새롭게 복간(復刊)했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광주·전남 문화예술 흐름을 따라 독자들과 동행해온 40년 여정(旅程)이었다.
‘예향’으로 본 감독의 성장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던 시기에 지방에서 새로운 잡지를 창간해 40년 동안 잡지를 발행해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 등 장기적인 경제난과 함께 인터넷과 스마트 폰의 부상에 따른 종이출판의 쇠퇴까지 겹쳤다. 그럼에도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잡지와 함께 해온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월간 ‘예향’은 지역 역사를 기록하는 아카이브(Archive) 역할을 톡톡히 한다. 역사·사회학자와 작가들이 1980~1990년대 ‘예향’에 게재됐던 과거 기사를 보기 위해 편집국을 찾아오곤 한다. 일찍이 ‘예향’은 한국현대사에서 지워졌거나 잊힌 호남지역 인사들을 재조명한 바 있다. 함평 출신 월북시인 최석두(1917~1951)와 호남 최초의 서양화가 김홍식(1897~1964)을 최초로 발굴(1994년 6월호)해 발자취와 예술세계를 소개했다. 그리고 ‘호남인물사’ 시리즈를 통해 납북 독립운동가 정광호(1992년 2월호), 신안 암태도 소작투쟁 지도자 서태석(1993년 1월호), 호남 근대교육의 선구자 고정주(1993년 3월호), 현대불교의 거목 만암 큰스님(1994년 2월호) 등을 다뤘다.
‘예향’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활동한 역사인물 발굴뿐만 아니라 당대의 문화예술계를 이끄는 명사들의 인생과 예술세계도 꾸준히 지면에 반영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장성 출신 임권택 감독은 ‘예향’ 1989년 10월호에서 자신의 포부를 이렇게 피력했다. 당시는 55살로 영화 ‘아다다’(신혜수, 1987년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수상)를 마치고 88 서울올림픽 공식 기록영화 ‘손에 손잡고’를 편집하고 있을 때였다.
“좋은 작품이란 그 나라의 토양에서 그 나라의 정서나 미적세계가 확실하다든지 메시지가 확실해야 합니다. 우리도 한국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 우리의 토양과 정서, 생활을 담고 강조한 우리 색깔의 영화를 만들어야 외국에 나가서 경쟁력이 생깁니다.”
이후 임 감독은 인터뷰에서 밝힌대로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년), ‘서편제’(1993년), ‘축제’(1996년) 등을 연출했고, 마침내 ‘취화선’(2002년)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100번째 연출 작품인 ‘천년학’(2006년)과 ‘달빛길어올리기’(2010년), ‘화장’(2014년)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82세 노장 감독은 ‘예향’ 인터뷰(2016년 6월호)에서 “인생이 녹아서 영화가 되고, 또 영화가 녹아서 인생이 된다”라고 술회했다. ‘예향’ 독자들은 임 감독의 구상이 27년의 시공간을 사이에 두고 작품으로 구현되는 과정을 지면을 통해 지켜볼 수 있었다.
독자와의 교감노력 지속
누구나 피부로 느끼듯 미래 출판시장과 잡지 시장의 전망은 녹록지 않다. 워낙 세태가 신문·잡지와 책 등 활자매체를 멀리하고, 손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스마트 폰의 위력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며 증명하듯 활자의 생명력은 강하다. 이제껏 해왔던 지역의 문화예술 트렌드를 다루고, 사회명사·예술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도 잡지를 받아든 독자들이 설렘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며 ‘울림’과 ‘떨림’을 줄 수 있는 좋은 잡지를 만드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 독자 여러분의 애정어린 성원과 질책을 바란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던 시기에 지방에서 새로운 잡지를 창간해 40년 동안 잡지를 발행해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 등 장기적인 경제난과 함께 인터넷과 스마트 폰의 부상에 따른 종이출판의 쇠퇴까지 겹쳤다. 그럼에도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잡지와 함께 해온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향’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활동한 역사인물 발굴뿐만 아니라 당대의 문화예술계를 이끄는 명사들의 인생과 예술세계도 꾸준히 지면에 반영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장성 출신 임권택 감독은 ‘예향’ 1989년 10월호에서 자신의 포부를 이렇게 피력했다. 당시는 55살로 영화 ‘아다다’(신혜수, 1987년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수상)를 마치고 88 서울올림픽 공식 기록영화 ‘손에 손잡고’를 편집하고 있을 때였다.
“좋은 작품이란 그 나라의 토양에서 그 나라의 정서나 미적세계가 확실하다든지 메시지가 확실해야 합니다. 우리도 한국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 우리의 토양과 정서, 생활을 담고 강조한 우리 색깔의 영화를 만들어야 외국에 나가서 경쟁력이 생깁니다.”
이후 임 감독은 인터뷰에서 밝힌대로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년), ‘서편제’(1993년), ‘축제’(1996년) 등을 연출했고, 마침내 ‘취화선’(2002년)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100번째 연출 작품인 ‘천년학’(2006년)과 ‘달빛길어올리기’(2010년), ‘화장’(2014년)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82세 노장 감독은 ‘예향’ 인터뷰(2016년 6월호)에서 “인생이 녹아서 영화가 되고, 또 영화가 녹아서 인생이 된다”라고 술회했다. ‘예향’ 독자들은 임 감독의 구상이 27년의 시공간을 사이에 두고 작품으로 구현되는 과정을 지면을 통해 지켜볼 수 있었다.
독자와의 교감노력 지속
누구나 피부로 느끼듯 미래 출판시장과 잡지 시장의 전망은 녹록지 않다. 워낙 세태가 신문·잡지와 책 등 활자매체를 멀리하고, 손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스마트 폰의 위력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며 증명하듯 활자의 생명력은 강하다. 이제껏 해왔던 지역의 문화예술 트렌드를 다루고, 사회명사·예술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도 잡지를 받아든 독자들이 설렘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며 ‘울림’과 ‘떨림’을 줄 수 있는 좋은 잡지를 만드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 독자 여러분의 애정어린 성원과 질책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