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배롱나무를 향해 걷는 사람들, 담양 명옥헌원림
2024년 09월 18일(수) 22:00
유난히 길었던 여름이 지난다. 나에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건 오로지 식물뿐이다. 정원에는 좀작살나무의 열매가 보라색으로 익어가고, 꽈리는 붉은 빛으로 변했다. 여름동안 샛붉었던 배롱나무도 녹색빛이 되어간다. 배롱나무에 꽃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여름이 끝날 것이다.

운동을 하다 공원에서 꽃송이가 얼마 남지 않은 배롱나무를 보며 몇 주전 담양에 다녀온 일이 생각났다. 출장차 광주에 간 나는 예매해둔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담양 명옥헌원림에 들르기로 했다.

명옥헌원림은 조선 중기 명곡 오희도와 그의 넷째 아들 오이정이 많은 저술을 남긴 별서정원이다. 계곡에 물이 흐르면 옥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고 해 ‘명옥헌’이라 이름 붙여졌다. 오희도는 당대의 인재로, 인조가 왕위에 오를 때 몇 번이고 오희도를 찾아 명옥헌에 왔다고 한다. 오희도는 연로한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제안을 거절하였다.

나는 네비게이션이 안내한 대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명옥헌원림을 가리키는 안내문을 따라 마을 길을 걸었다. 햇빛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그 거리가 몇 백미터 되지 않았음에도 정원으로 가는 길은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안내문을 따라 무작정 걷다 고개를 드니 시야가 확 트이며 눈 앞에 연못과 배롱나무, 연꽃이 있는 풍경이 한 눈에 펼쳐졌다. 작은 연못을 둘러 붉은 꽃이 가득 핀 배롱나무가 서 있고, 연못 위엔 연꽃도 두어송이가 피어 있었다. 연못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니 짙은 연꽃 향이 났다.

배롱나무는 백 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우는 나무란 의미의 중국명 백일홍나무에서 연유했다. 중국 원산으로 우리나라에 아주 오래전 도입돼 절과 궁궐에 심어져 왔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정원마다 배롱나무가 있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다만 이름처럼 꽃이 백 일 내내 피어 있는 것은 아니고, 한 나무에서 이 가지의 꽃이 지면 다른 가지의 꽃이 피는 식으로 꽃이 연이어 오래 핀다.

연못 뒤의 명옥헌을 올려다보니 유난히 붉게 물든 거대한 배롱나무가 보였다. 평일 오후인데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정원으로 들어왔고, 명옥헌에 앉아 더위를 식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옛 정원에서 이토록 많은 청년층을 본 건 오랜만이었다.

내가 명옥헌원림을 특별하게 기억하는 것은 정원이 워낙 아름다운 덕도 있지만, 정원 입구까지 땀 흘리며 걸었던 수고 그리고 가로막힌 입구를 지나야만 정원을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차장이 정원 바로 앞에 있었다면, 정원이 멀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도록 노출되어 있었다면 정원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쾌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여름 꽃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선 그만한 땀을 흘려야 한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명옥헌원림은 알려준다.

우리 모두가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얼마 전 서울 남산에 곤돌라를 추가로 설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케이블카와 곤돌라를 타면 품을 들이지 않고 편하게 높은 산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서 마주한 산과 직접 두 발로 오른 산의 풍경, 우리의 감각, 사유는 완전히 다르다. 쉽게 얻은 결과는 시시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케이블카와 곤돌라라는 건 자연은 자연대로 훼손하고, 풍경은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시대의 우리가 많은 것을 시시하다고 여기는 이유, 더 많은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근본적 이유는 쉽고 편한 길이 잘 닦인 문명, 그에 익숙해진 인간의 몸과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명옥헌원림에서 빠져나와 다시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왠지 짧게 느껴졌다. 정원으로 향하던 길에는 보이지 않던 식물들도 보였다. 탱자나무, 하늘타리, 모과나무, 분홍낮달맞이꽃 그리고 백일홍.

배롱나무만큼 오래 꽃이 피는 백일홍이 만개 중이었다. 백일동안 피는 붉은 꽃이란 의미의 백일홍 이름 때문에 배롱나무는 줄곧 백일홍나무라는 별명으로도 불려왔다. 그러나 배롱나무와 백일홍 둘은 전혀 다른 식물이다.

명옥헌원림의 아름다움 연유는 배롱나무에만 있는 게 아니라, 무더위에 땀흘려 정원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수고로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여름이었다.

<식물세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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