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초대석] “세상 눈치, 사람 눈치 안보고 작가로서 혼신의 힘 다해서 써”-장편소설 ‘문신’ 펴낸 소설가 윤흥길
2024년 05월 13일(월) 18:50 가가
‘밟아도 아리랑’·전쟁 풍습 모티브
2018년 1~3권 출간 지난해 완결
구상부터 완결까지 30여 년 걸려
살아숨쉬는 우리 민족 정체성 담아
‘일물일어’ 한 단어 찾아가며 집필
문학인생 총망라 만족도 높은 작품
2018년 1~3권 출간 지난해 완결
구상부터 완결까지 30여 년 걸려
살아숨쉬는 우리 민족 정체성 담아
‘일물일어’ 한 단어 찾아가며 집필
문학인생 총망라 만족도 높은 작품
소설가 윤흥길(82)이 장편소설 ‘문신’(전 5권)을 완결했다. 일제강점기 말기 대지주 최명배 가족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대의 격랑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를 풀어낸 ‘필생의 역작’이다. 전쟁터로 나가기 전 몸에 문신을 새기는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과 ‘밟아도 아리랑’을 모티브로 삼았다.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나선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구상부터 완결까지 30여 년 집념=‘젊은 남자가 병정으로 뽑혀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가족들이 얼른 알아볼 수 있게끔 몸에 새기는 문신’,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고향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비원이 담긴 일종의 부적’, ‘만약에 전사하더라도 가족들이 그 문신 보고 시신이나마 수습해 고향 선산에 묻어주기 바라는 마지막 소망을 표현하는 민족 특유 귀소본능의 도저한 경지’….
전쟁터에 나가기 전 남자들이 몸에 문신을 새기는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은 생경하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기는 물론 멀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에도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풍습이다.
소설가 윤흥길(82)은 오래 전 이규태의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읽다 ‘부병자자’를 처음 접했다. 또 북해도 등지로 징용 끌려갔던 조선인들이 “…밟아도 밟아도 죽지만 말아라 / 또다시 꽃 피는 봄이 오리라” 불렀던 ‘밟아도 아리랑’을 알게 됐다. 작가는 ‘부병자자’ 풍습과 ‘밟아도 아리랑’을 모티프 삼아 일제 말기를 시대 배경으로 하는 3부작 ‘큰 작품’을 구상했다. 하지만 집필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연재를 하던 문예지 폐간과 저작권 분쟁, 건강 문제로 인해 집필을 잠시 중단하는 등 애로를 겪었다. 마침내 2018년 12월 ‘문신’(문학동네) 1~3권을 펴냈고, 지난 3월에 나머지 4~5권을 내며 완결했다. 200자 원고지로 치면 6500매, 출간 도서 기준으로 2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당초 3부작 가운데 3부에 해당하는 작품은 앞서 1989년과 1995년 일본판과 한글판 ‘낫’으로 각각 출간됐다.) 첫 집필부터 완간까지 30여 년에 걸친 대장정을 마친 작가를 전북 완주군 창작의 공간에서 만났다.
▲30년 이상을 지속해온 장편소설 ‘문신’ 대장정을 마쳤습니다.
“1989년인가 문예잡지에 연재 지면을 얻어서 쓴 때부터 하면 30년이 조금 넘죠. 연수를 계산하기가 굉장히 복잡해요. 세상 눈치, 사람 눈치 안보고 작가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열심히 쓴 작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학관에 의해서 고집스럽게 끝까지 밀고 나갔기 때문에 독자들한테 널리 읽히고 안 읽히는 것에 상관없이 나로서는 만족도가 굉장히 높고, 보람을 많이 느끼는 그런 작품이죠.”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되는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이 생소합니다. 어떻게 해서 작품을 구상하게 됐나요?
“문신풍습은 갖가지 목적에서 전 세계적으로 다 퍼져 있는 건데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전사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문신을 새겨요. 아프리카나 동남아 일부 종족들은 종족을 식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몸에 새기기도 하고, 주술적인 의미에서 부적처럼 새기기도 해요. 우리나라는 ‘부병자자’ 풍습이 역사적으로 쭉 있어왔어요. 6·25때 동네 청년들이 입영 전에 ‘일심’(一心)이나 ‘충’(忠) 같은 문구를 새기는 것을 목격했어요. 어린 눈에 참 희한했어요. 나중에 생각하니까 그게 ‘부병자자’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의미나 내용은 증발해버리고 형식만 살아남은 거죠. 조선일보 주필하시던 이규태 선생이 ‘한국인의 의식구조’ 책을 내셨는데 그것을 읽다가 ‘부병자자’가 눈에 들어왔어요.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도저한 귀소본능과 ‘부병자자’를 연결시키면 상당히 의미 있는 소설이 되겠다는 확신을 하게 됐죠. 기독교에서 천국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삶의 연장으로 생각하는데, 기독교와도 맥이 닿더라고요. 고향 땅에 묻히고 싶은 그것과 생명의 시원인 천국의 본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것이 연결되는 그런 줄거리를 짜게 됐죠.”
▲5권 소설 속에 남도 사투리와 입말, 옛말들이 많아 문장에 감칠맛이 있습니다. 전라도 토속적인 정서를 살리기 위해 판소리 율조를 도입했다고 하는데요?
“독자들이 ‘사전을 놓고 낱말공부를 하며 읽는 재미가 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해요. 대화문에서는 전라도 사투리를 진하게 썼지만 지문은 낯선 단어라 그렇지 사실은 표준말이예요. 4·4조, 4·9조 판소리 율조를 비슷하게 흉내 내기 위해서 토씨를 많이 생략했어요. 그러다보니까 어순도 토씨를 생략해 버리면 문맥이 잘 안 통하는 경우가 생겨요. 그러면 어순을 바꿔버려요. 사투리뿐만 아니라 속담, 욕, 풍부한 비유법… 여러 가지 것들을 활용해서 전라도 토착정서를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것이 고향이 전라도가 아닌 독자들한테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히는 요소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박경리 작가, “큰 작품 쓰라” 격려=소설가 윤흥길은 ‘문학의 어머니’인 박경리(1926~2008) 선생의 말씀을 되새기며 오랜 시간에 걸쳐 ‘문신’을 완성할 수 있었다. “흙을 만지고 생명을 다루는 생활을 해야 된다”, “큰 작품을 써야 된다”, “전업작가 해야 된다”는 3가지 당부를 했다. 그 가운데 ‘큰 작품’에 대해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전 20권)를 능가하는 대작으로 나름 해석해 1980년대 초 10권 분량의 3부작을 구상했다. 하지만 타고난 필력이나 창작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절망하기도 했다. 이후 작가는 “인간과 인생, 사회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통찰력으로 진실을 바라보는 작품”이라는 선생의 ‘큰 작품’에 대한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심적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2020년 10월 세계 문학상인 ‘제10회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하며 “생명의 가치와 존엄을 강조한 선생님의 지론이 그대로 제 문학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읍 태생인 작가는 전주사범학교와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작가로서 처음 두각을 나타낸 때는 계간 ‘문학과 지성’ 1973년 봄 호에 중편소설 ‘장마’를 발표하면서 부터다. 절친인 정양(82) 시인(우석대 명예교수)과 작가의 아픈 가족사가 투영돼 있다. ‘토속적 샤머니즘’을 통해 분단시대의 첨예한 이념대립 해법을 제시해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1977년 발표된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연작은 1971년 8월 10일 성남시 수정·중원구(당시 광주군 중부면)에서 일어난 ‘광주 대단지사건’을 처음으로 작품 속에 녹여냈다.
◇‘완장’ 출간 40주년…“풍자는 자객의 칼”=“‘찌를 자(刺) 자를 옆구리에 차고 있는 풍자가 남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의 칼과도 같은 것이라면 해학은 남의 콧구멍을 간질이는 깃털과도 같은 것이다.”
출간 40주년을 맞은 장편소설 ‘완장’(현대문학)에 실린 ‘작가의 말’이다. 5공 군부독재정권 시절인 1980년대 초, 작가는 시국사건 여파로 지리산 노고단밑 심원마을에서 한 달 여 동안을 혼자 지냈다. 작가를 ‘미물 같은 존재로 전락시킨 거대 권력에 효과적으로 보복’하기 위해 풍자와 해학을 동원해 소설을 썼다.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작가는 에세이집 ‘내 영혼의 봄날’(2001년)에서 ‘왜 글을 쓰는가?’라는 프랑스 어떤 신문의 설문에 “내 영혼의 빈 잔을 채우기 위한 모험여행 삼아 가출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소설을 쓴다”는 요지로 답했다고 말한다. 한국현대소설을 일본에 널리 알린 일본 소설가 나카가미 겐지(中上健次·1946~1992)는 작가에게 ‘한국문학의 한국다움’을 일깨워주었다. 인명이나 지명을 슬쩍 바꿔치기 하면 어느 나라 이야기 인지 애매해지는 작품을 굳이 한국작가가 써야 할 이유가 없다고 조언했다. 작가는 2016년 7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올해로 등단 56년을 맞은 작가는 ‘소설을 써야만 연명이 가능한 사람’이다. 한밤중에 주로 글을 쓴다.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작품 창작에 몰두한다. 평생동안 우리말 사전을 끼고 살아왔다. 타고난 재능보다 아주 지독한 노력으로 작가 행세를 해왔다고 말한다. 진득하게 오래 버티는 ‘무거운 엉덩이’가 비결이다. 책상 오른편에는 과거에 사용한 수동·전동 타자기와 워드 프로세스 4대가 놓여있다. ‘소설가 윤흥길’의 문학인생을 오롯이 보여주는 집필도구이자 ‘빵굽는 타자기’이다. 요즘 작가의 관심은 역사와 전통에 쏠려 있다. 앞으로 조선 말기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쓸 계획이다. 또 손주들을 위한 동화도 여러 편 쓰려한다.
/글=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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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인가 문예잡지에 연재 지면을 얻어서 쓴 때부터 하면 30년이 조금 넘죠. 연수를 계산하기가 굉장히 복잡해요. 세상 눈치, 사람 눈치 안보고 작가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열심히 쓴 작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학관에 의해서 고집스럽게 끝까지 밀고 나갔기 때문에 독자들한테 널리 읽히고 안 읽히는 것에 상관없이 나로서는 만족도가 굉장히 높고, 보람을 많이 느끼는 그런 작품이죠.”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되는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이 생소합니다. 어떻게 해서 작품을 구상하게 됐나요?
“문신풍습은 갖가지 목적에서 전 세계적으로 다 퍼져 있는 건데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전사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문신을 새겨요. 아프리카나 동남아 일부 종족들은 종족을 식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몸에 새기기도 하고, 주술적인 의미에서 부적처럼 새기기도 해요. 우리나라는 ‘부병자자’ 풍습이 역사적으로 쭉 있어왔어요. 6·25때 동네 청년들이 입영 전에 ‘일심’(一心)이나 ‘충’(忠) 같은 문구를 새기는 것을 목격했어요. 어린 눈에 참 희한했어요. 나중에 생각하니까 그게 ‘부병자자’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의미나 내용은 증발해버리고 형식만 살아남은 거죠. 조선일보 주필하시던 이규태 선생이 ‘한국인의 의식구조’ 책을 내셨는데 그것을 읽다가 ‘부병자자’가 눈에 들어왔어요.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도저한 귀소본능과 ‘부병자자’를 연결시키면 상당히 의미 있는 소설이 되겠다는 확신을 하게 됐죠. 기독교에서 천국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삶의 연장으로 생각하는데, 기독교와도 맥이 닿더라고요. 고향 땅에 묻히고 싶은 그것과 생명의 시원인 천국의 본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것이 연결되는 그런 줄거리를 짜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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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 작가의 창작 혼이 담긴 타자기. |
“독자들이 ‘사전을 놓고 낱말공부를 하며 읽는 재미가 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해요. 대화문에서는 전라도 사투리를 진하게 썼지만 지문은 낯선 단어라 그렇지 사실은 표준말이예요. 4·4조, 4·9조 판소리 율조를 비슷하게 흉내 내기 위해서 토씨를 많이 생략했어요. 그러다보니까 어순도 토씨를 생략해 버리면 문맥이 잘 안 통하는 경우가 생겨요. 그러면 어순을 바꿔버려요. 사투리뿐만 아니라 속담, 욕, 풍부한 비유법… 여러 가지 것들을 활용해서 전라도 토착정서를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것이 고향이 전라도가 아닌 독자들한테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히는 요소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박경리 작가, “큰 작품 쓰라” 격려=소설가 윤흥길은 ‘문학의 어머니’인 박경리(1926~2008) 선생의 말씀을 되새기며 오랜 시간에 걸쳐 ‘문신’을 완성할 수 있었다. “흙을 만지고 생명을 다루는 생활을 해야 된다”, “큰 작품을 써야 된다”, “전업작가 해야 된다”는 3가지 당부를 했다. 그 가운데 ‘큰 작품’에 대해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전 20권)를 능가하는 대작으로 나름 해석해 1980년대 초 10권 분량의 3부작을 구상했다. 하지만 타고난 필력이나 창작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절망하기도 했다. 이후 작가는 “인간과 인생, 사회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통찰력으로 진실을 바라보는 작품”이라는 선생의 ‘큰 작품’에 대한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심적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2020년 10월 세계 문학상인 ‘제10회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하며 “생명의 가치와 존엄을 강조한 선생님의 지론이 그대로 제 문학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읍 태생인 작가는 전주사범학교와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작가로서 처음 두각을 나타낸 때는 계간 ‘문학과 지성’ 1973년 봄 호에 중편소설 ‘장마’를 발표하면서 부터다. 절친인 정양(82) 시인(우석대 명예교수)과 작가의 아픈 가족사가 투영돼 있다. ‘토속적 샤머니즘’을 통해 분단시대의 첨예한 이념대립 해법을 제시해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1977년 발표된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연작은 1971년 8월 10일 성남시 수정·중원구(당시 광주군 중부면)에서 일어난 ‘광주 대단지사건’을 처음으로 작품 속에 녹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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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한 윤홍길(오른쪽 세번째) 작가와 부인 유계영씨. |
출간 40주년을 맞은 장편소설 ‘완장’(현대문학)에 실린 ‘작가의 말’이다. 5공 군부독재정권 시절인 1980년대 초, 작가는 시국사건 여파로 지리산 노고단밑 심원마을에서 한 달 여 동안을 혼자 지냈다. 작가를 ‘미물 같은 존재로 전락시킨 거대 권력에 효과적으로 보복’하기 위해 풍자와 해학을 동원해 소설을 썼다.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작가는 에세이집 ‘내 영혼의 봄날’(2001년)에서 ‘왜 글을 쓰는가?’라는 프랑스 어떤 신문의 설문에 “내 영혼의 빈 잔을 채우기 위한 모험여행 삼아 가출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소설을 쓴다”는 요지로 답했다고 말한다. 한국현대소설을 일본에 널리 알린 일본 소설가 나카가미 겐지(中上健次·1946~1992)는 작가에게 ‘한국문학의 한국다움’을 일깨워주었다. 인명이나 지명을 슬쩍 바꿔치기 하면 어느 나라 이야기 인지 애매해지는 작품을 굳이 한국작가가 써야 할 이유가 없다고 조언했다. 작가는 2016년 7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올해로 등단 56년을 맞은 작가는 ‘소설을 써야만 연명이 가능한 사람’이다. 한밤중에 주로 글을 쓴다.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작품 창작에 몰두한다. 평생동안 우리말 사전을 끼고 살아왔다. 타고난 재능보다 아주 지독한 노력으로 작가 행세를 해왔다고 말한다. 진득하게 오래 버티는 ‘무거운 엉덩이’가 비결이다. 책상 오른편에는 과거에 사용한 수동·전동 타자기와 워드 프로세스 4대가 놓여있다. ‘소설가 윤흥길’의 문학인생을 오롯이 보여주는 집필도구이자 ‘빵굽는 타자기’이다. 요즘 작가의 관심은 역사와 전통에 쏠려 있다. 앞으로 조선 말기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쓸 계획이다. 또 손주들을 위한 동화도 여러 편 쓰려한다.
/글=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