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라는 핑계로 말을 전할 수 없는 세상 - 조혜원 동신대 상담심리학과 3년
2024년 04월 23일(화) 00:00 가가
묻고 싶은 게 있다. 최근에 카톡이나 문자 말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쓰거나 받아본 경험이 있는가? 장문의 손 편지 또는 쪽지, 하다못해 인터넷 편지라도 쓰거나 받았다면 암울한 세상에 꽃 한 송이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해주고 싶다.
갈수록 늘어나는 영상 콘텐츠와 줄어드는 책 판매량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는 점점 글과 멀어지고 있다. SNS와 영상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마음을 표현하는 데 인색해지고, 대면하는 사람 사이는 생략된 글의 수만큼이나 어둡고 차갑게만 보인다. 하루에 하는 메시지, 그 몇 글자로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담아내기엔 분명히 어려운 세상. 우린 어쩌면 소통 창구가 부족했던 예전보다 훨씬 더 표현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 동생이 타지로 대학을 입학하게 되자 아쉬운 마음에 몇 글자 적어본 블로그 글이 친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입방아에 오르는 걸 경험했다. 좋은 글이었다는 사람부터 이렇게까지 친한지 몰랐다 등 흥미로운 반응들 속에서 문득 씁쓸함이 느껴지는 건 죄책감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이렇게 말하지도 못할 텐데, 왜 진즉에 쓰려고 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낯부끄럽다는 핑계로, 차마 이런 걸 쓸 그릇이 안 된다는 핑계로 우린 너무나 많은 것을 제쳐두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됐다.
짧은 글 하나에 많은 걸 담으려면 상당한 고뇌가 필요한데, 그게 어렵다면 길게 전하면 되는 일 아닌가. 아무리 단순한 사람일지라도 결국 사람은 누구보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생물이다. 관계를 연결하며 그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데서부터 이미 단순한 몇 마디로 쉽사리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풍선 몇 개로 하루를 아니 이틀을, 아니 어쩌면 한 해를 그렇게 낭비하고 만다. 전하지 못한 말들은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먼 훗날 후회와 함께 가슴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예를 들면 가버린 동생에게 함께하자고 붙잡는 후회부터 이미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 표현할걸 하는 후회까지 말이다. ‘표현해야 할 때 표현하지 않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그저 우리는 쑥스러워서, 복잡해서, 귀찮아서, 불편해서, 이런 하찮은 이유로 기어이 저지르고야 만다.
장문에 관한 관심이 점차 줄어듦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도 있다. 글을 제대로 읽거나 요약하는 법, 문단을 나누거나 사소한 맞춤법과 띄어쓰기 지키는 일까지 소홀해진다. 여러 번 고쳐 쓰고, 읽어보며, 익숙해지면 금방 이뤄낼 일들을 등한시하게 된다.
어린 학생들이 문제라고 함부로 말하는 어른들 또한, 예외는 없다. 글의 논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주장만을 강요하는 글로 세대 갈등을 부추기는 어른이 얼마나 많은가. 소통하지 못하는 글은 사회 갈등을 빚어내고 생기있던 사회를 침묵하게 만든다.
글을 쓰고, 읽고,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짧게 쓰려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차라리 길게 풀어내어 정성을 느끼게 한다면, 혐오의 시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도 그 벽을 조금씩 금 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벽을 허물어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안 될 거라 미루어 짐작하며 점점 더 벽을 두껍게 만들기보다는 지금이라도 노력했으면 좋겠다. 이 시대를 예전보다 개방적이고 다채롭게 만들어 보자. 우리의 손끝과 정성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겐 글이 있고 글에는 벽을 허물 수 있는 힘이 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도 물론 듣기에 좋고 하기에 편하지만, 마음의 무게를 가득 실어 전달하고자 하는 진심이 있다면, 오늘 당장 펜을 들어 정성껏 풀어쓰는 게 좋을 것이다. 휴대용 티슈가 됐든, 쓰다 남은 공책의 빈 여백이 됐든, 정식으로 쓰려고 남겨둔 편지지가 됐든 그 어디든 간에 말이다. 너무 짧은 몇 마디로 취급하기에 당신의 마음은 너무나 깊고, 단 몇 마디로 상대방이 당신을 이해하기엔 아직 둘 사이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며칠 전 동생이 타지로 대학을 입학하게 되자 아쉬운 마음에 몇 글자 적어본 블로그 글이 친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입방아에 오르는 걸 경험했다. 좋은 글이었다는 사람부터 이렇게까지 친한지 몰랐다 등 흥미로운 반응들 속에서 문득 씁쓸함이 느껴지는 건 죄책감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이렇게 말하지도 못할 텐데, 왜 진즉에 쓰려고 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낯부끄럽다는 핑계로, 차마 이런 걸 쓸 그릇이 안 된다는 핑계로 우린 너무나 많은 것을 제쳐두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됐다.
장문에 관한 관심이 점차 줄어듦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도 있다. 글을 제대로 읽거나 요약하는 법, 문단을 나누거나 사소한 맞춤법과 띄어쓰기 지키는 일까지 소홀해진다. 여러 번 고쳐 쓰고, 읽어보며, 익숙해지면 금방 이뤄낼 일들을 등한시하게 된다.
어린 학생들이 문제라고 함부로 말하는 어른들 또한, 예외는 없다. 글의 논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주장만을 강요하는 글로 세대 갈등을 부추기는 어른이 얼마나 많은가. 소통하지 못하는 글은 사회 갈등을 빚어내고 생기있던 사회를 침묵하게 만든다.
글을 쓰고, 읽고,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짧게 쓰려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차라리 길게 풀어내어 정성을 느끼게 한다면, 혐오의 시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도 그 벽을 조금씩 금 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벽을 허물어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안 될 거라 미루어 짐작하며 점점 더 벽을 두껍게 만들기보다는 지금이라도 노력했으면 좋겠다. 이 시대를 예전보다 개방적이고 다채롭게 만들어 보자. 우리의 손끝과 정성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겐 글이 있고 글에는 벽을 허물 수 있는 힘이 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도 물론 듣기에 좋고 하기에 편하지만, 마음의 무게를 가득 실어 전달하고자 하는 진심이 있다면, 오늘 당장 펜을 들어 정성껏 풀어쓰는 게 좋을 것이다. 휴대용 티슈가 됐든, 쓰다 남은 공책의 빈 여백이 됐든, 정식으로 쓰려고 남겨둔 편지지가 됐든 그 어디든 간에 말이다. 너무 짧은 몇 마디로 취급하기에 당신의 마음은 너무나 깊고, 단 몇 마디로 상대방이 당신을 이해하기엔 아직 둘 사이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