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김정연 동신대 언어치료학과 4년
2024년 03월 01일(금) 22:30 가가
메마른 가지에 새싹이 움트고 만물이 소생하는 이 아름다운 봄날, 역설적이게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삶과 죽음이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과도 같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 국민 삶의질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우리나라 평균 기대수명은 82.7세였다. 통계조사가 시작된 1970년 이후 처음으로 줄어들었고, 자살률은 비록 수치는 감소했지만 여전히 OECD 국가 중 가장 높았다. 인간의 수명은 과학기술 문명의 영역이고, 자살률은 삶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
사실 기대수명 단축은 코로나19의 여파로 인한 것이지, 1970년 58.7세였던 데 비하면 51년만에 무려 21.8년이나 늘었다. 머지않아 인간의 최대수명이 130세를 넘을 거라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인류는 왜 불멸을 추구하는 것일까.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베커는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진단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평균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고 봤다.
과연 삶이란, 또는 죽음이란 그저 허망한 것일까?
나는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거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 여기, 모든 순간이 빛나는 것이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며 살기에는 내 삶이 너무 소중하다.
시인 정호승은 “인생은 여행”이라고 했는데, 그 여행의 끝인 ‘죽음’에 대해 나는, 내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리고 나는 왜 살아가는 걸까? 프리드리히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 때 내가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직업 중 나의 적성에 부합하는 직업을 찾았고, 그 직업에 종사하기 위해 학교에 다니고 있다. 나는 삶의 의미를 찾았고 그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날마다 하루 분량의 행복을 느끼면서 말이다.
삶의 의미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때도 삶이 의미 없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 땐 먼 미래가 아닌 한 달 후에 죽음이 찾아온다고 가정해보았다. 삶의 선택지가 놀랄 만큼 단순해졌다. 소중한 사람을 자주 만나 마음을 표현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여행을 가고, 부질없는 것들을 탐하느라 아등바등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작은 일들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불확실한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라는 말이 있다. 나 또한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늘 하루에 인생이 담겨 있는 것처럼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 가치 있는 삶을 살다가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은 결국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그 안에서 성찰을 낳는다. 죽음이 있기에 삶을 볼 수 있고, 삶이 있기에 죽음을 볼 수 있으며, 그 사이에 존재하는 나 또한 엿볼 수 있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옛 로마에서는 시종에게 개선장군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했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교만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며 삶의 제한성을 인지하고 그 ‘제한’이 주는 소중함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소중하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될 것이다.
때로는 ‘망각’이 행복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니체는 자신의 저서인 ‘도덕의 계보’에서 “인간은 본성상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무의식 상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있으나 의식상에서는 인식하고 있지 않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알고 있지만 모르고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이, 죽지도 살지도 않은 그 중간에 서서 무의식적으로 삶의 가치를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곧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삶과 죽음이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과도 같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 국민 삶의질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우리나라 평균 기대수명은 82.7세였다. 통계조사가 시작된 1970년 이후 처음으로 줄어들었고, 자살률은 비록 수치는 감소했지만 여전히 OECD 국가 중 가장 높았다. 인간의 수명은 과학기술 문명의 영역이고, 자살률은 삶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
과연 삶이란, 또는 죽음이란 그저 허망한 것일까?
시인 정호승은 “인생은 여행”이라고 했는데, 그 여행의 끝인 ‘죽음’에 대해 나는, 내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리고 나는 왜 살아가는 걸까? 프리드리히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 때 내가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직업 중 나의 적성에 부합하는 직업을 찾았고, 그 직업에 종사하기 위해 학교에 다니고 있다. 나는 삶의 의미를 찾았고 그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날마다 하루 분량의 행복을 느끼면서 말이다.
삶의 의미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때도 삶이 의미 없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 땐 먼 미래가 아닌 한 달 후에 죽음이 찾아온다고 가정해보았다. 삶의 선택지가 놀랄 만큼 단순해졌다. 소중한 사람을 자주 만나 마음을 표현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여행을 가고, 부질없는 것들을 탐하느라 아등바등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작은 일들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불확실한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라는 말이 있다. 나 또한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늘 하루에 인생이 담겨 있는 것처럼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 가치 있는 삶을 살다가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은 결국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그 안에서 성찰을 낳는다. 죽음이 있기에 삶을 볼 수 있고, 삶이 있기에 죽음을 볼 수 있으며, 그 사이에 존재하는 나 또한 엿볼 수 있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옛 로마에서는 시종에게 개선장군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했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교만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며 삶의 제한성을 인지하고 그 ‘제한’이 주는 소중함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소중하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될 것이다.
때로는 ‘망각’이 행복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니체는 자신의 저서인 ‘도덕의 계보’에서 “인간은 본성상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무의식 상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있으나 의식상에서는 인식하고 있지 않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알고 있지만 모르고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이, 죽지도 살지도 않은 그 중간에 서서 무의식적으로 삶의 가치를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곧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