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의 역설 - 정민 조선대 중국어문화학과 1년
2024년 02월 26일(월) 22:00 가가
‘관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는 아마 드물 것이다. 관심은 단연 사랑의 표현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관심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사랑으로 다가온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관심있게 지켜본다고 하면 더 잘 해내고 싶고 뿌듯한 마음이 든다. 지켜보는 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지고, 간혹 그 마음이 더 커지면 되레 부담이 돼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와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간사하게도 누군가가 나에게 무관심하다면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겠지만, 결국 마음 한켠 서운함이 자리잡고 그 사람을 야속하게 생각하며 가끔은 관심을 끌고 싶어지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관심과 무관심의 사회에 살고 있다. 어쩌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우린 분명 타인에게 지나치게 많은 관심으로 상처를 주기도, 지나치게 무관심하여 상처를 주기도 한다. 무엇이 정답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때 그 마음을 가졌던 진실한 내 마음은 어땠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순수한 의도의 사랑스러운 관심이었는지, 혹은 당장 닥친 현실이 바빠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면서도 고개 돌리기 바빠 무관심한 척했는지.
우린 종종 눈부신 플래시 속에 살다 떠난 이들의 뉴스를 듣곤 한다. 그러나 다음 뉴스로 고독사란 주제가 나와도 잠시 안타까울 뿐, 이상해하지 않는다. 무관심 속에 쓸쓸히 죽어간 이와 쏟아지는 관심에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이가 공존하는 사회가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면 사람들은 곧 무관심했던 이들을 욕하고, 한편으론 관심 두던 이들을 욕한다. 그러나 이 역시 무엇이 틀렸다 확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들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우리가 그 간극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서로 간의 적당함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남에게 주는 것은 물론 나에게 오는 것까지도 말이다. 관심과 무관심 둘 다 처음엔 고맙거나 별생각 들지 않지만 과열되기 시작하면 부담스럽고 서운하다. 더 나아가 서로가 미워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전에 우린 서로가 너무 멀고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주는 사람은 언제나 받는 이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특히나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일에 일방이란 없기에 더더욱 섬세해야 한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놀다 넘어져 생긴 작은 상처를 자꾸만 손으로 건들곤 했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놀러 나간 놀이터에서 눈물을 찔끔한 기억이 있다. 이미 십 년도 더 지난 상처기에 전혀 아프진 않지만 아직도 내 무릎에 남아있는 흉터를 보면 그때의 서러웠던 기억이 되살아나고는 한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상처라도 계속해서 마찰이 일어나면 결국 흉이 진다. 그리고 그 흉은 잊을만하면 나타나 또다시 나를 아프게 한다.
관심과 무관심의 공존이 모순적으로 느껴지지만, 서로에게 데었더라도 약간의 틈이 있다면 금방 회복 해낼 수 있다. 때로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필요도 너무 가까이 있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저 서로에게 흉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적당한 틈을 유연하게 조절할 줄 알아야 할 뿐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기 마련이다. ‘처음과 같이’라는 말을 수백 번 되뇌지만, 마음 또한 다르지 않기에 처음과 같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는 다다익선이 아니겠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도가 지나치는 순간, 우리는 결국 지치고 만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시대가 아닐까. 양극화의 과열이 뜨거운 우리 사회에서 또 한 번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필요한 지금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관심있게 지켜본다고 하면 더 잘 해내고 싶고 뿌듯한 마음이 든다. 지켜보는 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지고, 간혹 그 마음이 더 커지면 되레 부담이 돼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와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간사하게도 누군가가 나에게 무관심하다면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겠지만, 결국 마음 한켠 서운함이 자리잡고 그 사람을 야속하게 생각하며 가끔은 관심을 끌고 싶어지기도 할 것이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놀다 넘어져 생긴 작은 상처를 자꾸만 손으로 건들곤 했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놀러 나간 놀이터에서 눈물을 찔끔한 기억이 있다. 이미 십 년도 더 지난 상처기에 전혀 아프진 않지만 아직도 내 무릎에 남아있는 흉터를 보면 그때의 서러웠던 기억이 되살아나고는 한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상처라도 계속해서 마찰이 일어나면 결국 흉이 진다. 그리고 그 흉은 잊을만하면 나타나 또다시 나를 아프게 한다.
관심과 무관심의 공존이 모순적으로 느껴지지만, 서로에게 데었더라도 약간의 틈이 있다면 금방 회복 해낼 수 있다. 때로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필요도 너무 가까이 있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저 서로에게 흉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적당한 틈을 유연하게 조절할 줄 알아야 할 뿐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기 마련이다. ‘처음과 같이’라는 말을 수백 번 되뇌지만, 마음 또한 다르지 않기에 처음과 같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는 다다익선이 아니겠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도가 지나치는 순간, 우리는 결국 지치고 만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시대가 아닐까. 양극화의 과열이 뜨거운 우리 사회에서 또 한 번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필요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