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웃음 - 송혁기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2024년 02월 13일(화) 00:00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2023 카타르 아시안컵 축구대회가 막을 내렸다. 역대 최고 선수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대표팀이었던 만큼, 실망과 아쉬움이 어느 때보다도 크다. 기대와 달리 답답하기만 한 경기력을 보며 날 선 비판도 해보지만, 연이은 연장전에 몸을 사리지 않고 끝까지 사력을 다해 뛰는 선수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안쓰럽기만 했다. 그런데 안타까움을 분노로 만드는 건, 클린스만 감독의 웃음이었다.

클린스만 감독은 자신의 웃음을 문제 삼은 인터뷰에서, 웃은 게 잘못이라면 그건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답변했다. 운동경기는 이길 때도 질 때도 있는 법이니 우리가 못하고 상대가 잘했다면 웃으며 인정해 주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추진하던 일이 예상과 달리 물거품이 될 때 나오는 허탈한 웃음일 뿐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선량해 보이는 웃음이 분노를 사는 것은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만이 아니다. 선수 개개인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전략이 보이지 않았고 선수 기용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거기에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재택근무를 했다는 논란마저 다시 제기되는 마당에, 한번 지면 탈락하고 마는 국가 대항 토너먼트 경기의 감독으로서 중요한 시점에 번번이 웃음을 보이는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일소비하청(一笑比河淸)’의 근엄함이 능사는 아니다. 웃음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시계추처럼 규칙적인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한 칸트도 웃음을 치료제로 권하며 신체적 쾌활함이 정신에 주는 힘을 강조했다. 문제는 어느 시점에 어떻게 웃는가에 달렸다. 파안대소처럼 마냥 기분 좋은 웃음이 있는가 하면 살며시 호감을 표현하는 미소도 있고, 어이가 없어서 웃는 고소(苦笑), 그리고 비방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조소(嘲笑)도 있다.

정약용은 남이 아닌 자신을 웃음의 대상으로 삼아 조소하는 시를 여러 편 지었다. “이제는 웃으려 해도 남은 웃음이 없다”라면서도 ‘일소(一笑)’라는 시를 지었고, ‘자소(自笑)’에서는 책이라고 생긴 건 모조리 다 읽으며 청운의 꿈도 품었지만 이제 머리 벗겨진 몸뚱아리만 남았으니 내일 걱정할 것 없이 오늘 한 잔 마시는 게 제일이라고 읊조리기도 했다. 때로 그 웃음의 대상은 자신을 넘어 세상의 부조리를 향한다.

“곡식 많은 집은 먹을 사람이 없고 / 자식 많은 집은 배고파 걱정이네 / 높은 자리 꿰찬 건 바보들인데 / 재능 뛰어난 자 쓰이질 못하지 / 온갖 복 다 갖춘 집은 드물고 / 최고의 길은 쇠퇴하기 마련이라 / 아비가 인색하면 자식은 흥청망청 /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천치 / 보름달 뜨면 구름이 끼고 / 꽃이 피면 바람이 망쳐놓지 / 세상만사 다 그렇고 그런 것 / 혼자 웃는 이유 아무도 모르지”

혼자 웃는다는 뜻의 ‘독소(獨笑)’라는 시이다. 목민의 도리와 경세의 이상을 구체적이고 방대하게 설계하여 제시한 정약용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시의 형식으로 투정하듯 가볍게 세태를 풍자하기도 했다. 웃음을 빌리지 않고는 포착하기도 표현하기도 어려운 지점이다. 우월감에서 비롯한 조롱이 아니라 자신마저 희화화하면서 본질을 꿰뚫는 여유다.

한자 ‘소(笑)’를 보면 양손을 벌리고 아장아장 걸어오며 두 눈으로 활짝 웃는 아기의 모습이 떠올라 미소 짓게 된다. 웃음은 전염성이 있어서 가라앉기 쉬운 우리를 다독이고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이번 아시안컵 대표팀 선수들의 훈련장 모습을 담은 영상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선수들의 밝은 웃음이었다. 빡빡한 일정 가운데 모여 힘든 훈련을 소화하면서도 서로 장난치며 해맑게 웃는 선수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하고있는 일이 좋고 곁에 있는 사람이 좋아서 웃는 웃음만큼 아름다운 게 있을까? 무슨 이유에서든 그 웃음의 에너지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은 여전히 아쉽지만, 그런 웃음이 있는 한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떤 웃음은 도무지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지만, 어떤 웃음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보게 한다. 선수들의 건강한 웃음이 하루 빨리 회복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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