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쟁(擊錚) - 송기동 예향부장
2024년 01월 23일(화) 00:00
18세기 조선 정조때 흑산도 주민들은 지역(紙役)으로 곤혹을 치렀다. 남자는 8세부터 40세까지 닥나무 1만 2900근(50냥 가격)을 양향청(糧餉廳)에 바쳐야 했다. ‘닥나무 세금’이다. 그렇지만 지역이 오래되다 보니 척박한 외딴섬에 닥나무가 남아날 리 없었다. 주민들은 닥나무 세금의 폐단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김준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섬문화답사기’ 신안 편(2012년)에서 한양까지 올라가 격쟁(擊錚)을 올린 ‘흑산도 백성’ 김이수를 소개한다. 그는 “1791년 정조 임금의 행차를 가로 막고 격쟁을 올렸다. 격쟁은 임금이 행차할 때 징이나 꽹과리를 치면서 시선을 집중시켜 백성들이 직접 민원을 호소하는 방법이다. 당시 흑산도 주민이 겪고 있던 가장 큰 폐단은 ‘닥나무 세금’이었다. 수차례 관청이나 상부에 소송을 내고 시정을 요청하였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한양까지 올라가 직접 호소했던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격쟁을 검색하면 210여 건의 기사가 뜬다. 격쟁할 수 있는 요건을 ‘자손이 조상을 위하여’ 등 법률로 네 가지만 정했다. 하지만 사노(私奴)가 군복으로 변장하고 칼을 찬 채 궁궐에 들어와 격쟁을 하는 등 무리한 격쟁이 자주 있었던 모양이다. 명종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백성이 원통하고 답답한 일이 있을 적에 격쟁하여 하소연하는 것은, 부득이 한 것이다. 그러나 하지 못할 일을 가지고 억지로 격쟁한다면, 어찌 폐단이 없겠는가. 요사이 백성의 원망이 많이 쌓이어 격쟁하는 일이 습관화되었으니, 나는 몹시 한탄스럽다.”(명종 14년 4월 9일)

최근 강성희 진보당 국회의원이 전북특별자치도 출범식 행사장에서 대통령 경호원들에게 입을 틀어막힌채 끌려 나갔다. 강 의원은 대통령과 악수하며 “국정기조를 바꿔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왕조시대에도 임금의 행차를 막고 징을 치며 원통함을 호소하는 ‘격쟁’을 올릴 수 있었음을 감안하면 21세기 제왕적 대통령제는 오히려 수백년 전보다 퇴행적이라는 생각이다. 대척점에 있는 정치인일지라도 포용하고 소통하려는 정치 지도자의 통큰 자세가 아쉽다.

/송기동 예향부장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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