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4계] 한국의 산티아고…겨울 순례길 해남 ‘달마고도’
2024년 01월 20일(토) 14:10
산과 바다와 나를 만나는 길, 達磨古道
땅끝마을 미황사가 품은 남도명품길
천년의 역사가 깃든 트래킹 명소
수행과 삶을 잇는 치유의 길

달마고도에서 만난 남해안

전 세계 많은 이들의 버킷리스트로 손꼽히는 길이 있다.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향해 걸어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순례’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자 저마다의 이유를 품은 사람들의 발길이 항상 끊이지 않는 길이다.

소설 ‘연금술사’로 유명한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도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후 작가가 되었다고 하니 길의 유명세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길을 걷는다는 것. 어쩌면 단순해 보이는 걷기에는 꽤 강력한 치유의 힘이 있다. 살면서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절실할 때, 혼자만의 사색이 필요할 때, 성취감을 느끼고 싶을 때 길 위에서 답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도보 여행길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매력이 있다.

달마고도 코스
남도는 아름다운 바다와 멋진 산, 그리고 오랜 역사가 깃든 땅까지 무엇 하나 빠질 게 없는 완벽한 도보 여행지이다. 그중 땅끝마을 해남은 걷기에 좋은 길이 많다. 특히 달마산 옛길을 복원한 달마고도(達磨古道)는 도보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트래킹 명소로 미황사와 함께 해남 관광의 대표 콘텐츠로 사랑받고 있다.

이름부터 달마고도, 왠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할 것 같지만 길이 열린 지 7년밖에 되지 않은 새 길이다. 물론 옛길을 복원한 것이니 완벽한 새 길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던 길을 되살렸기 때문에 새 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달마산이 품은 미황사. <전남도 제공>
달마고도 길을 복원한 이는 미황사 주지였던 금강스님이다. 금강스님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미황사는 물론이고 남도명품길로 소문난 달마고도 길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낡고 오래된 작은 사찰에 불과했던 미황사는 속가 나이 23세의 젊은 스님이 부임하면서 변화를 맞았다. 미황사에 온 금강스님은 손수 지게를 지고 일하면서 쇠락한 사찰을 중건했고 덕분에 다 허물어져 가던 미황사는 해남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사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주지가 된 금강스님은 흔적만 남은 달마산 옛길이 못내 안타까웠고 2017년 2월부터 복원에 나섰다. 장장 9개월 동안 총 1만여 명의 손길이 더해진 끝에 달마선 7부 능선을 따라 남도명품길이 완성됐다. 2017년 11월에 첫 길이 열린 달마고도(達磨古道)는 총 17.74km의 트래킹 로드로 미황사가 길의 출발지이자 최종 종착지이다.

달마고도 이정표
달마고도의 특별함은 길의 생김새에서 찾을 수 있는데 다양한 시설물이 설치된 다른 둘레길과 달리 흙길과 돌길로만 이어졌다.

중장비의 도움 없이 손에 들 수 있는 작은 농기구만으로 길을 만들었고 나무 계단이나 난간 같은 인공 시설물도 보이지 않는다. 큰 돌을 쌓아서 경계를 만들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 곳에 자연스럽게 세월이 쌓이면서 편안한 모양새를 만들어가고 있다. 덕분에 자연을 벗 삼아 걷는 즐거움이 크고 깊다. 3년 전 이른 봄에 금강스님은 30여 년 동안 몸담았던 미황사를 떠났지만 그분의 손길은 여전히 미황사와 달마고도 곳곳에 남아있다. 공들여 복원한 달마산 옛길이 ‘해남 달마고도’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달마고도 수제명품길
달마고도 길을 한 바퀴 완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반 성인 걸음으로 6시간 남짓. 네 개의 코스별로 부분 트래킹이 가능하다. 숲길 트래킹이 처음인 초보부터 산행에 익숙한 숙련자까지 자신의 수준에 맞게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걷기 여행의 미덕은 찬찬히 주변을 살피며 즐기는 데 있다. 순위를 정하는 경주가 아니니 서두를 필요가 없고 서두른다고 17km 남짓한 길을 단숨에 걸을 수도 없으니 마음을 비우고 걷는 건 어떨까. 자신의 발걸음에 맞춰 걷다 보면 언젠가 가고자 했던 목적지가 선물처럼 눈앞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흙길과 돌길 끝에 한 폭의 그림 같은 땅끝 다도해의 멋진 풍광이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달마산은 소사나무와 편백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서 피톤치드 같은 나무의 좋은 기운을 담뿍 받으며 걸을 수 있다. 겨울철에 실내 생활이 많다 보니 몸 여기저기가 결리고 입맛이 없을 때가 많은데 달마고도를 걸으면 막혔던 코와 목도 뻥 뚫리고 머리까지 개운해지는 데다 잃었던 밥맛까지 돌아온다. 숲길만큼 좋은 겨울 보약이 없다는 걸 몸소 체험할 수 있다.

달마고도에서 내려보는 남해안
걷기 여행은 혼자여도 좋고 함께여도 좋다. 어느 계절에 걸어도 최고의 추억을 선사한다. 우리가 길 위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한다.

인생이 힘들고 꼬일 때, 사람에게 지치고 치일 때 그냥 걸어보자. 아무 목표 없이 그저 두 발에 힘을 실어 땅바닥을 박차고 나아가는 단순한 행위가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어깨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새털처럼 가벼워진 마음은 어떤 장애물도 무섭지 않고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다.

/글·사진=정지효 기자 1018hyohy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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