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소설가’를 대면하는 시대 - 조주형 광주대 문예창작과 1년
2024년 01월 15일(월) 22:00 가가
얼마 전 AI 소설가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봤다. AI가 소설을 잘 쓸 수 있는가를 주제로 한 실험 영상이었는데, 문예 창작에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AI가 쓴 소설과 사람이 쓴 소설을 보여주고 AI가 쓴 소설을 찾아내는 실험이었다. 이 영상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벌써 AI가 소설을 쓴다는 것이 기본값이 됐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 값에 더해 AI에게 소설을 ‘잘 쓸 수 있는가’란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새삼 AI의 발전이 제곱 단위라는 걸 체감했다.
실험 결과 학생들은 AI가 쓴 소설을 찾아냈다. 문장의 흐름이나 단어 배치의 어색함 등이 근거였다. 다만 충격적인 것은 학생들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AI가 썼다고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사람이 썼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거라는 내용의 말이었다. 무서웠다. 문예 창작을 전공하는 나로서 위기감을 느꼈다. 소설가를 꿈꾸는 입장에서 30초 만에 괜찮은 소설을 쓴 AI를 보며 허탈함이나 무기력함을 느꼈다. 정말 ‘잘’ 쓸 수 있게 됐다는 게 확 와 닿았다. 영상을 클릭하면서도 실험의 질문이 조금 이르다고 생각했었는데 완전한 내 착각이었다.
영상을 다 보고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나랑 AI 사이에 사람과 AI라는 것 말고 다른 점이 있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봐도 잘 모르겠다는 답만 떠올랐다. 아직 완결성이 높은 소설을 쓰지 못하는 AI나 나나 같은 습작생 처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누가 습작생 시절을 더 빨리 벗어날까에 대한 것이었다. AI가 나보다 더 빠를 것 같다는 불안감으로 오싹했다.
나는 관련 기사를 찾기 시작했다. 내심 AI가 인간 소설가를 대체할 수 없을 거라는 내용을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면서였다.
아무리 자료를 뒤져도 내가 내리는 결론은 대체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AI가 소설을 쓴다고 해도 그게 인간이 쓴 게 아니라면 독자들에게 읽히지 않을 것이라는 한 작가의 말을 시작으로 뒷받침하는 말들을 찾았지만, 결론은 그렇게 났다.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된 한국AI작가협회의 홈페이지에는 커다랗게 ‘AI와 함께하는 창작의 불꽃, 새로운 예술의 시대’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미 작가의 세계에서 AI를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인간이 작가로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듯 보였다.
다른 영상 매체나 기사에서도 앞으로 창작은 AI와 함께 해야 한다는 걸 제시하고 있었다. 자존심 상했다. 이제 막 작가의 길로 들어선 내게 작가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그걸 글로써 써 내려가는 사람의 이미지인데 그걸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생각하는 과정에서든 쓰는 과정에서든 누군가의 개입을 허용해야 한다는 게 내 것을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효율 앞에서 자존심은 이길 수 없었다. 작가라는 직업을 AI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AI를 활용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앞으로의 시대를 상상하며, 하나 더 의문이 들었다. 만약 AI가 창작을 완전히 할 수 있다면? 인간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 감정을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면? 내가 AI와 인간 소설가에 대해 한 첫 의문의 답이 이 물음에서 나왔다. 아직 AI는 인간의 감정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그게 AI와 인간의 차이다. 그래서 인간이 AI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AI가 인간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모르겠다. 다만 그때가 온다면 정말 AI가 인간 소설가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 내 걱정에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오버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AI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란 질문을 보고 몇 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잘 쓸 수 있을까’란 질문을 본 게 내게는 충격이었다. 최악의 최악을 상상하게 됐다. 나는 그런 시대를 많은 소설가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I를 어디까지, 언제까지 활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정말 AI를 활용해야만 소설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말이다.
실험 결과 학생들은 AI가 쓴 소설을 찾아냈다. 문장의 흐름이나 단어 배치의 어색함 등이 근거였다. 다만 충격적인 것은 학생들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AI가 썼다고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사람이 썼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거라는 내용의 말이었다. 무서웠다. 문예 창작을 전공하는 나로서 위기감을 느꼈다. 소설가를 꿈꾸는 입장에서 30초 만에 괜찮은 소설을 쓴 AI를 보며 허탈함이나 무기력함을 느꼈다. 정말 ‘잘’ 쓸 수 있게 됐다는 게 확 와 닿았다. 영상을 클릭하면서도 실험의 질문이 조금 이르다고 생각했었는데 완전한 내 착각이었다.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봐도 잘 모르겠다는 답만 떠올랐다. 아직 완결성이 높은 소설을 쓰지 못하는 AI나 나나 같은 습작생 처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누가 습작생 시절을 더 빨리 벗어날까에 대한 것이었다. AI가 나보다 더 빠를 것 같다는 불안감으로 오싹했다.
나는 관련 기사를 찾기 시작했다. 내심 AI가 인간 소설가를 대체할 수 없을 거라는 내용을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면서였다.
아무리 자료를 뒤져도 내가 내리는 결론은 대체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AI가 소설을 쓴다고 해도 그게 인간이 쓴 게 아니라면 독자들에게 읽히지 않을 것이라는 한 작가의 말을 시작으로 뒷받침하는 말들을 찾았지만, 결론은 그렇게 났다.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된 한국AI작가협회의 홈페이지에는 커다랗게 ‘AI와 함께하는 창작의 불꽃, 새로운 예술의 시대’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미 작가의 세계에서 AI를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인간이 작가로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듯 보였다.
다른 영상 매체나 기사에서도 앞으로 창작은 AI와 함께 해야 한다는 걸 제시하고 있었다. 자존심 상했다. 이제 막 작가의 길로 들어선 내게 작가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그걸 글로써 써 내려가는 사람의 이미지인데 그걸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생각하는 과정에서든 쓰는 과정에서든 누군가의 개입을 허용해야 한다는 게 내 것을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효율 앞에서 자존심은 이길 수 없었다. 작가라는 직업을 AI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AI를 활용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앞으로의 시대를 상상하며, 하나 더 의문이 들었다. 만약 AI가 창작을 완전히 할 수 있다면? 인간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 감정을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면? 내가 AI와 인간 소설가에 대해 한 첫 의문의 답이 이 물음에서 나왔다. 아직 AI는 인간의 감정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그게 AI와 인간의 차이다. 그래서 인간이 AI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AI가 인간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모르겠다. 다만 그때가 온다면 정말 AI가 인간 소설가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 내 걱정에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오버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AI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란 질문을 보고 몇 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잘 쓸 수 있을까’란 질문을 본 게 내게는 충격이었다. 최악의 최악을 상상하게 됐다. 나는 그런 시대를 많은 소설가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I를 어디까지, 언제까지 활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정말 AI를 활용해야만 소설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