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후식 칼럼] ‘희망 고문 정치’는 이제 그만- 논설실장·이사
2023년 04월 19일(수) 00:15
정치는 사회 문제와 공공 의제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도출하는 과정이다. 주권자인 국민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직자들을 선출하고, 그들로 하여금 숙의(熟議)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도록 한다.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해 통합을 이끌어내는 것이 정치의 본령인 셈이다.

한데 언제부턴가 정치가 본궤도를 이탈했다. 소통은커녕 극단적인 대결 정치, 진영 정치, 팬덤 정치가 판치고 있다. 철학자 니체가 “정치인은 인간을 두 종류로만 나눈다. 도구 아니면 적”이라고 통찰했듯이 ‘내 편 아니면 모두 적’으로 돌리며 혐오와 조롱의 정쟁을 일삼는다. 양극화된 정치는 국민까지 둘로 갈라놓았다. 복합 경제 위기 속에 민생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지만 여야의 안중에 국민과 미래는 없는 듯하다. 권력 획득을 위한 과정이라고 봐주기에는 너무나 파괴적이고 절망적이다.



‘정치·민생 실종’ 윤석열 정부 1년

작금의 정치 현실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다. 제왕적이라고 할 만큼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공정과 상식’을 시대정신으로 내세워 0.73%포인트의 역대 최저 득표율 차로 신승했다. 당선 기자회견에서는 “국민을 편 가르지 말고 통합의 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간절한 호소”라며 “의회와 소통하고 야당과 협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보여 준 모습은 약속과는 거리가 멀다. 야당 대표와 만남은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아 최장기 불통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상명하복의 동일체라는 검사들이 국정 전반을 장악하며 강경 일변도로 국민을 갈라 치고 협치는 외면하고 있다. 경제·외교·안보도 국민 눈높이에 못미친다. 가해자 일본에 면죄부를 주는 ‘강제 징용 3자 변제안’과 과로를 부추기는 ‘주69시간 근무제’로 거센 반발을 불렀다. 집권 초반인데도 지지율이 20~30%대에 머무는 까닭이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라는 국정 목표 역시 체감하기 힘들다. 지방대 위기가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겠다며 수도권 대학 정원 규제를 푸는가 하면, 300조 원이 투자되는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는 경기도 용인에 조성하기로 했다. 산업 집적화를 명목으로 수도권 공장 설립 규제를 완화했다. 입으로는 균형 발전을 외치며 수도권 집중을 되레 가속화시키는 기만적 행태다. 광주·전남이 공동 유치에 나선 반도체 특화단지 평가 항목도 수도권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지역 공약이나 현안에 대한 해결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5·18의 정신은 헌법 전문에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수장에 ‘5·18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고 “헬기 사격은 허위”라며 왜곡을 일삼은 김광동 위원장을 임명했다. 이어 교육부는 ‘2022 개정 초중고 교육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삭제해 지역사회의 반발을 불렀다. 급기야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전광훈 목사로부터 ‘5·18 정신을 헌법에 넣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반대한다”고 밝혔다. 전 목사가 ‘(윤 대통령이) 전라도에 립 서비스한 것이냐’고 묻자, 김 최고위원은 “표 얻으려면 조상 묘도 판다는 게 정치인 아니냐”고 답하기도 했다.

지난 대선 이후 광주에서 가장 논쟁적인 이슈 중 하나는 복합 쇼핑몰이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광주시민들이 다른 지역에는 다 있는 복합 쇼핑몰을 간절히 바라고 계신데 민주당이 반대해 왔다”며 쟁점으로 쏘아 올렸다. 대선 공약으로는 상식 밖이라는 평가도 있었으나 덕분에 광주 지지율을 역대 보수 진영 후보로는 가장 높게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후 신세계·현대백화점·롯데 등 유통 3사들이 경쟁에 나서고 있지만, 국정 과제임에도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지원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말이 없다.

쌀값 안정과 농가 소득 보장을 위해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윤 대통령은 “포퓰리즘”이라며 실효적 대안도 없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가 하면 감사원은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해 추진된 한전공대 설립의 적법성에까지 칼날을 들이댔다.



성큼 다가온 총선…협치 물꼬 터야

169석의 거대 야당인 민주당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다. 분열과 갈등으로 여권의 독주와 일방통행을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 강성 지지자들의 좌표 찍기와 문자 폭탄으로 당내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검찰이 이재명 대표에 이어 2021년 전당대회 돈 봉투 의혹을 정조준하면서 ‘사법 리스크’가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민생은 경기 침체와 고물가·고금리의 그늘에 짓눌려 신음하고, 지방은 생기를 잃은 채 소멸을 향해 치닫고 있다.

‘희망 고문’이라는 말이 있다. 거짓된 희망으로 외려 괴로움을 주는 행위를 일컫는다. 여야 모두 선거 때면 ‘민생 수호’ ‘정치 개혁’ ‘국민 통합’ ‘균형 발전’ 등의 정치적 수사를 쏟아 내지만 대부분 입발림에 그치고 있다. 말이나 안 했으면 기대도 않으련만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저버리니 고문이 따로 없다. 그렇다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 정치가 환멸을 안겨 주지만 힘없는 서민들이 기댈 곳은 미우나 고우나 정치뿐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정치란 바로잡는 것”(政者, 正也)이라고 했다. 다행히도 아직 약속을 지킬 시간이 여야 모두에게 남아 있다. 내년 총선까지는 1년, 윤 대통령 임기는 4년이나 남았다. 여야 영수회담 등을 통해 꽉 막힌 정국의 물꼬를 트고 협치를 여는 통 큰 결단이 필요하다. 사법 리스크는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고 정치권은 민생부터 챙겨야 한다. 5·18 정신의 헌법 전문 반영과 정치 개혁, 균형 발전을 위한 개헌 논의를 시작하고 지역 공약을 이행할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하여 국민이 진짜 희망을 꿈꾸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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