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각서- 김향남 수필가
2023년 04월 16일(일) 22:30
허탈한 마음에 이 글을 쓴다. 나는 각서 한 장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니다. 한 장이 아니라 두 장이다. 나의 미래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내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아무 능력이 없다 해도 결코 구박을 당하거나 버림받을 염려가 없었다. 날마다 날마다 효도를 받으면서 꿈 같은 여생을 보낼 것이었다. 그런데 그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아직도 그 글씨며 문구가 눈앞엔 듯 훤하고 꾹꾹 눌러 찍은 지문까지 선명히 떠오르는데, 서랍 속에 꽁꽁 넣어둔 비장의 무기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름하여 효도 각서였다. 내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자발적으로 작성한, 언제까지 돈을 갚겠다거나 어떠한 처분에도 군말 없이 따르겠다거나 무엇을 포기하겠다거나 하는 그런 각서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효도할 것을 맹세한다는 효도 각서!

방학은 끝나가고, 큰애는 밀린 숙제가 걱정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그냥 일기가 아니라 주제가 있는 일기, 즉 효도 일기였다. 난감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없다고 했던 숙제를 막바지에서야 내놓는 것도 마뜩잖고, 믿거니 하고 내버려 둔 나의 방심도 못마땅했다. 그렇다고 일기를 대신 쓸 수도 없고, 지어서 쓰라고 할 수도 없고, 안 해도 된다고 할 수도 없고, 왜 안 했느냐 닦달할 수만도 없는, 참으로 곤란한 지경이었다. 애꿎은 선생님을 탓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이는 코가 쏙 빠져 제 방으로 들어가고, 무슨 뾰족 수가 없을까 나 역시 골머리가 아팠다. 밤이 깊어 큰애가 배시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노트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물론 일기장이었다. 자랑스러운 듯 계면쩍은 듯 내민 일기장에는 빠져 있던 자리가 모두 채워져 있었다. 몇 줄 되지는 않았으나 주제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오늘은 설거지를 했다. 저녁밥을 먹고 엄마 대신 내가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하다가 하마터면 그릇을 깰 뻔했다. 설거지는 너무 어렵고 힘들다. 엄마는 어떻게 날마다 설거지를 할까?

이런 식으로 시작된 일기는 청소·심부름·안마·동생 돌보기 등으로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땐 잘했다고 칭찬을 해야 할지, 이런 억지가 어딨느냐고 호되게 야단을 쳐야 할지…. 게다가 문제는 또 있었다. 여기에 엄마의 사인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

일기를 쓰고 안 쓰고는 아이의 문제였지만, 사인을 하고 안 하고는 순전히 내 몫이었다. 나는 다시 또 난관에 봉착했다. 날마다 성실하게 써야 할 일기를 하룻날 급조한 것도 그렇고, 더러 사실과 어긋나는 내용도 그렇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판관이 되기는 참 어렵다. 엄마 노릇 하기는 더 어렵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하더니 불쑥 묘책 하나가 떠올랐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효도는 이제부터 하는 거야. 여기 일기장에 쓴 대로 진짜로 그렇게 하는 거야. 이게 거짓말이 안 되게 하려면 그렇게 해야겠지? 어때?”

그러니까 꿔 간 걸 갚아야 사인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내 제안에 큰애의 표정이 화들짝 밝아졌다. 말귀 빠른 아이는 눈까지 반짝반짝해지더니 뜬금없이 각서를 쓰겠다고 했다. 며칠 전 제 단짝 친구와 우정 각서를 썼다더니 요즘엔 각서가 대센가? 웃음이 나왔으나 굳이 말릴 것까지는 없었다. 곧장 백지를 가져오더니 영원히 효도할 것을 맹세한다는 내용을 또박또박 써 나갔다.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1학년짜리 작은애가 저도 쓰겠다고 나섰다. 이런 황공할 데가!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덕분에 나는 유례없는 부자가 되었다. 조목조목 효도하겠다는 각서를 두 장이나 받았으니, 그보다 더 큰 수확도 없을 것이었다.

다시 서랍을 뒤져볼까 하다 그만둔다. 찾아봐야 그 효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증거물이 없어졌다고 기억까지 사라지지는 않을 터. 아이들에게 종종 그때 일을 들려줘야겠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둥, 전혀 기억이 없다는 둥 시치미를 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 사라진 각서 대신 기억이 찾아오고 웃음이 남는다면 그건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아닌가?

가만히 그날을 생각하고 있노라니 저 깊이 걸리는 게 하나 있다. 공수표가 될지라도 나도 그런 각서 몇 번은 써 보고 살걸. 하늘로 가신 당신들께도 그런 호사 몇 번쯤은 누리게 해 드렸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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