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청산도 수학여행-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2022년 11월 06일(일) 23:30
바다는 맑고 투명했다. 하늘과 데칼코마니였다.

“정치만 생물이 아니야, 인간도 생물이다.” 정치 이야기를 하던 친구가 문득 탁자를 치며 말했다. 우리도 생물이니 내일 생사조차 알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의기투합했다. 목적지는 금방 청산도로 정했다.

삼라만상이 변하고 제행무상인 세상에 우리만 만고불변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도 시야를 넓히고, 우정도 돈독하게 쌓자는 것이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내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친구다. 친구는 두 번째 나다. 그러므로 너는 곧 나다. 좀 발칙하고 해괴한 논리였지만 금방 스무 명 남짓 회갑을 맞은 시골 친구들이 청산도 수학여행 길에 올랐다. 까불까불했던 경용이는 청바지를 입었고, 자전거 통학을 했던 회영이는 멀미약을 돌렸다. 승용이는 배낭 가득 먹거리를 가져왔다.

여행은 충분히 우릴 젊게 했다. 누군가 배 위에서 동요를 불렀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우린 합창이라도 하듯 따라 불렀다. 그리고 자연스레 옛날을 끄집어냈다. 체육대회와 소풍 이야기가 나왔고, 또 몇 선생님 이야기를 꺼내서 그때를 추억했다. 옛날은 꽤 괜찮은 안주였다. 첫사랑 이야기는 핵심 메뉴였다. 놀라운 것은 그 많던 여자아이 중에서 우린 몇 아이만 좋아했다는 점이다. 겹치고 편중된 첫사랑. 키스는커녕 손조차 잡아보지도 못한 애가 탄 이야기는 처음만큼이나 시작은 거창하였으나 끝은 언제나 흐지부지 미완성이었다.

청산도는 꽤 괜찮은 섬이다. 이런 곳에 이제 왔다니 좀 미안했다. 낮은 지붕과 납작납작한 돌담, 온돌식 다랑논을 보면서 잦은 왜구의 출몰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맞서 살아간 청산도 사람들의 지난한 삶이 피부로 다가왔다. 늘 청산을 꿈꾸며 살았다. 그런 청산도 역시 낙원은 아니었다.

우린 가던 길을 멈추고 어느 호젓한 방파제에 차를 세웠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면 파도가 코러스를 했고, 단체 사진을 찍으면 낚싯배와 갈매기가 멋진 배경이 되어주었다. 친구 이야기 중에는 간혹 생활이 어려운 친구 이야기도, 결혼에 실패한 이도, 몇 해 전 교통사고로 먼저 간 이의 이름도 나왔다. 또 암이 가장 무서운 적이라며 웃고 살자고 낄낄거리기도 했고, 또 우리 등딱지에 바짝 붙어 따라온 시간, 오늘을 떼어 내려 애를 썼다.

한 친구가 그랬다. “오래 걸으려면 좋은 신발이 필요하듯 잘 살려면 좋은 친구, 좋은 인연이 필요하다.” 모두 킥킥거리며 손뼉을 쳤다.

다음 친구가 또 외쳤다. “오늘처럼 한날한시에 항꾸네 가자.”

우리 모두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반대한 이가 없었다. 모두 턱이 하늘로 올라가도록 껄껄껄 웃었다. 그리고 좌우로 친구를 바라보며 또 웃었다. 행복은 낮에 먹은 멍게처럼 붉게 익어갔다. 늦가을 햇살이 노년으로 가는 우리를 포근하게 비춰주었다.

몇이 다음에도 또 오자고 했다. 우린 그러자고 약속하고 각자 헤어졌다. 하지만 다음에 누가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세월은 또 우리 중 몇 녀석을 저 멀리 떼어 놓을 것이다.

여행은 자연스럽게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게 한다. 같이 걷다 보면 절로 마음도 하나가 된다. 자연히 슬픔은 나누고 행복은 더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시간, 우린 당분간 청산도가 준 선물로 마음 든든하게 살아갈 것이다. 우리 등 뒤로 바다가 동요를 불러준다. 우리가 불렀던 동요이다.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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