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타박타박 오르는 산길, 무등산은 인생학교!
2022년 09월 15일(목) 22:30 가가
광주·담양·화순 걸친 능선…무진악·무정산·서석산 등으로 불려
2013년 국립공원 승격, 2018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보호
산신이 지켜준, 배고픔 덜어준, 천천히 목표에 닿게한 ‘축복의 산’
2013년 국립공원 승격, 2018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보호
산신이 지켜준, 배고픔 덜어준, 천천히 목표에 닿게한 ‘축복의 산’


광주, 담양, 화순에 걸친 능선으로 구성된 무등산은 ‘축복의 산’이자 우리 모두의 ‘인생학교’다. 지난 2019년 11월 열린 무등산국립공원 정상 개방 행사 모습. /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산에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부르면 반가이 대답하는 산에 사는 메아리... 메아리가 살게 시리 나무를 심자!” 산을 찾아 줄지어 걷던 어린 시절 소풍날을 기억해. 산등성이 살랑대는 바람이며 멀리 내려다뵈는 근사한 고향 풍경. 파리에 가면 에펠탑이 어디서나 보이듯이 광주는 세상의 어떤 도시도 부럽지 않은 무등산을 가졌다. 광주 사람들은 무등산에서 나고 자라며 무등산을 보고 살아간다. 이것은 신성한 타워이고 사원이며 나아가 어머니의 젖가슴이요 아버지의 무덤이다.
파리엔 에펠탑, 뉴욕엔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면 광주엔 무등산이 있다. 저 높은 뫼에 누가 업고 데려다주는 수도 있겠지만, 제 있는 힘껏, 스스로 오르곤 한다. ‘물은 셀프!’, 예전 식당에선 ‘물은 각자!’라고 써 있기도 했는데, 시골 양반들이 그걸 보고 “각자야! 물 가져와라” 그랬다지. 순자 말자 영자 말고 각자 씨. 산을 오를 때도 각자 자기 호흡을 고르면서 제 발로 걸을 때 정상에 닿게 된다. 무등산은 각자의 길로 올라서 모두로 합하는 품과 능선을 가졌다.
무등산은 광주, 담양, 화순에 걸친 능선으로 구성된 산이다. 무진악, 무정산, 무덤산, 무당산(성황산), 서석산, 무등산 등 여러 가지 이름을 가졌다. 등급을 매길 수 없다하여 무등산이라 했단 설이 가장 널리 퍼진 유래. 보통 문빈정사에서 시작해 새인봉, 중머리재, 장불재, 입석대, 서석대를 돌아 다시 증심사 방향으로 내려오곤 그런다. 무등산은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13년엔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2018년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보호되었다. 주상절리인 바위를 안산암이라 하는데, 잘라내면 반듯한 사면체 블록이 된다. 광주 읍성을 쌓을 때, 쉽게 잘라다가 성벽에 둘러 얹었다고 전해진다. 아랫동네엔 바위를 떼다가 지은 절과 집과 성벽 등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75%가 산악 지형이라고 하지. 옛사람들은 산에 ‘산신님’이 산다고 믿었다. 영국의 선교사 존 로스는 1879년 ‘코리아의 역사’를 썼는데, “코리아는 불교 신자보다 산신을 믿는 사람이 더 많은 나라다”고 운을 뗀다. 고대엔 산신이 대개 여성이었다. 여성 산신을 이름하여 산각시, 성모, 산마수라, 산신할매라 했다지. 이후엔 유교가 들어와 남성 할아버지로 성별이 바뀐다. 남성중심 가부장제의 몹쓸 영향이다. 불교는 이 산신을 수용하여 토착화에 성공하는데, 산신 돌탑을 세우고 산신의 초상화 격인 탱화도 내걸었다. 산신 할배가 들고 있는 도사 지팡이엔 표주박이 달렸는데, 내용물은 불로불사 무병장수를 돕는 술이란다. 또 탱화에 호랑이도 등장하는데, 산중 호걸 호랑이를 마냥 두려워 않는 민심을 담았다. 호랑이는 신령하고 영특하며 신중한 동물이라 쉽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믿었다. 다만 죄지은 자나 부패한 벼슬아치를 혼내는 수호장수로 생각했다.
또 산신탱화의 귀퉁이에 부처님 제자 ‘독성 나반존자’도 등장하는데, 독성이란 혼자서 득도한 성자라는 뜻. ‘빈도라발라사 나한’을 독성, 나반존자라 한다. 머리가 움푹 벗겨지고 흰 눈썹이 축 늘어진 얼굴을 하고 있으며, 어깨선이 훤히 드러난 붉은 가사를 입고 있다. 아마도 인도인의 모습을 묘사한 듯하다. 독성은 코삼비국의 벼슬을 얻었다가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는데, 신통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백성들이 신통력에 혹할까 염려한 붓다는 나반존자에게 은둔하여 고요히 성불하라 일렀다. 이후 나반존자는 혼자 선정에 들어 대각했다고 전해온다.
또 산신각엔 칠성탱화도 보이는데, 별자리 그림은 도교적 무속의 영향으로 보인다. 북극성신은 노인으로 분해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정수리를 튀어나오게 그린 것은 ‘지혜가 풍부한 노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 더러 용왕도 산신각에 그려서 모시는데, 산에서 비롯한 냇물이 멀리 바다로 나아가 넘실넘실 대양을 채우듯 마침내 크나큰 소원을 이루라는 민속신앙이다.
산신의 음덕 덕분일까. 무등산을 오르던 산악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찾아 떠돌았다. 1987년 전남대 의과대학 산악회 원정대가 네팔 렌포강 봉을 등정했다. 이후 1992년 광주우암산악회 박찬기 대장은 낭가파르밧봉을 올랐고, 조선대 마나슬루 원정대도 히말라야 산들을 등정했다. 1993년 광주전남 학생산악연맹은 지상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는데, 순천대 3학년 박현재 대원이 정상에 우뚝 섰다. 산악인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가끔 인연이 닿아 뵙곤 했던 김홍빈 대장을 잊을 수 없다. 광주를 베이스 캠프 삼은 그는 장애인으로선 최초 기록들을 세웠다. 1991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오르다 열 손가락을 모두 잃고 방황하였다. 고향 사람들의 정과 격려에 힘입어, 2009년부터 시작하여 7대륙 최고봉을 13년 동안 완등했는데 히말라야 14좌 중 13좌를 올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2021년, 히말라야의 고봉 브로드피크 원정길에 하산 과정에서 실종, 별세했다. 대장은 그렇게 57세로 무등산과 히말라야의 높다랗고 푸른 별이 되었다.
무등산 아래 나환자들이 모여 살던 공동묘지터는 과연 어딜까. 그들이 숨고 숨어든 천막집은 어딜까. 김준태 시인의 시 ‘아리랑’이 구슬픈 곡소리나 같아라. “달밤 공동묘지. 무덤과 무덤 사이 죽은 듯이 누워있는 여자 문둥이 하나. 도깨비불들 속에서 그러나 기어이 아이를 낳는고나” 시인의 시 가운데 짧지만 가장 여운이 긴 시. 무등산자락의 성자, 나환자의 아버지 최흥종 목사를 또 우리는 기억한다. 그는 무등산의 영험한 목자였으며 예언자였다. 소싯적 왈패요 깡패로 불리던 그가 예수 집안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음악 때문이었다.
“선교사덜이 광주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갖고 온 축음기가 광주 사람들에겐 최대 관심사였지라. 조그만 상자 안에서 사람의 노래소리가 나니깐 광주 사람덜이 상자 속에 사람이 들어있다 아니다, 저렇게 작은 상자에 들어갈 사람이 있겄는가 의견이 둘로 나뉘었지라. 그러자 최흥종이 끼가 발동했넌지 나가 그것을 확인해 보겄노라 선교사 집에 과감하게 들어가 뿌렀제잉.” 최목사의 제자인 김준호 선생의 후일담이다. 1911년 광주엔 국내 최초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나병원’이 개원했다. 이후 봉선동 산기슭으로 옮겨서는 전체 수용자가 600명에 이르렀다. 최흥종은 이 시설의 우두머리였는데, 나환자를 들쳐 업고 수시로 광주천을 건너다녔다. 시설은 주변의 눈총으로 여수의 애양원에 집단 이주하게 된다. 그는 노년에 의재 허백련 선생과 깊이 교류하며 무등산에 은거했는데, 성경과 도덕경을 같이 읽으며 수양을 보탰다.
무등산자락은 광주 시민들의 배고픔도 덜어주었다. 요샌 비싸서 부잣집의 호사가 되었으나, 멧돼지만큼 굵은 토종 수박이 자란다. 또 계곡엔 보리밥집이 있어 수제 동동주나 막걸리와 함께 보리 방귀의 연료를 주입해주었지. 집에 걸친 나무에 따라 보통 상호를 짓기를 ‘느티나무, 당산나무, 정자나무, 오동나무집’ 어쩌고 하던 보리밥집. 무청 쌈과 막 씻은 배추를 내오고 멸젓을 한주먹 퍼다가 놓으면 소박하되 황홀한 상차림이 된다. 한때 촌닭을 기르며 백숙집들이 늘어선 계곡은 모두 저 멀리 운림동 순환도로 근처로 내려갔고, 대대로 내려오던 밥상도 입맛따라 변하여 카페로 우후죽순 업종 변경.
2002년에 나는 증심사 주지 일철 스님과 의기투합, 환경음악회 ‘무등산 풍경소리’를 만들어 증심사를 매달 찾았다. 이른바 부주지로 소문이 났고, 부자되느니 불자되시라 했다고 이단삼단 소리까지 들었다. 당시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김인주 선생과 가수 박문옥 선생, 그리고 종교인모임 일원으로 내가 참여했다. 증심사 주차장 아스콘을 걷어내고 매달 한 차례씩 문화의 달밤이 펼쳐졌다. 우리 지역에선 만나기 귀한 분들을 모셨다. ‘산사람’의 가수 이정선, 이상은, 김두수, 한영애 씨 등이 차례차례 증심사 무대를 찾았다. 가수이자 인기 진행자 노영심 씨와 동무하며 지낼 때였는데, 토크 콘서트를 꾸리는 법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거창한 종교예식이나 특정 부류를 위한 마당이 아니라 ‘무등’이야말로 인간 세상을 정화하고 발전시켜나감을 깨달았다. 그러나 스님이 갑자기 병을 얻어 입적하시고, 나는 스스로 하산하였다. 산에서 계속 풍악을 울리는 게 선배이자 도반에게 죄스러웠다.
인생에서 포기라는 말은 배추 셀 때만 쓰는 말이라고 한다. 산을 오를 때 포기하지 말고 천천히 올라가면 목표했던 곳에 가닿을 수 있겠지. 무등산이 가까이 있어 큰 스승이렷다. 우리는 이를 ‘무등산 인생학교’라 부르자. 예서 인생살이를 된통 배울 수 있다. 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한마디로 축복이다. 높은 층수에서 살자고 고층 아파트들을 허가하여 무등산을 다 가리고 말았는데, 무등산 하나 높으면 되었지 왜들 이렇게 까치발로 서려는지 모르겠다 정말.
임의진
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 피는 마을’,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여행자의 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
또 산신탱화의 귀퉁이에 부처님 제자 ‘독성 나반존자’도 등장하는데, 독성이란 혼자서 득도한 성자라는 뜻. ‘빈도라발라사 나한’을 독성, 나반존자라 한다. 머리가 움푹 벗겨지고 흰 눈썹이 축 늘어진 얼굴을 하고 있으며, 어깨선이 훤히 드러난 붉은 가사를 입고 있다. 아마도 인도인의 모습을 묘사한 듯하다. 독성은 코삼비국의 벼슬을 얻었다가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는데, 신통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백성들이 신통력에 혹할까 염려한 붓다는 나반존자에게 은둔하여 고요히 성불하라 일렀다. 이후 나반존자는 혼자 선정에 들어 대각했다고 전해온다.
또 산신각엔 칠성탱화도 보이는데, 별자리 그림은 도교적 무속의 영향으로 보인다. 북극성신은 노인으로 분해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정수리를 튀어나오게 그린 것은 ‘지혜가 풍부한 노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 더러 용왕도 산신각에 그려서 모시는데, 산에서 비롯한 냇물이 멀리 바다로 나아가 넘실넘실 대양을 채우듯 마침내 크나큰 소원을 이루라는 민속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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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 작 ‘무등산과 출근길’ |
무등산 아래 나환자들이 모여 살던 공동묘지터는 과연 어딜까. 그들이 숨고 숨어든 천막집은 어딜까. 김준태 시인의 시 ‘아리랑’이 구슬픈 곡소리나 같아라. “달밤 공동묘지. 무덤과 무덤 사이 죽은 듯이 누워있는 여자 문둥이 하나. 도깨비불들 속에서 그러나 기어이 아이를 낳는고나” 시인의 시 가운데 짧지만 가장 여운이 긴 시. 무등산자락의 성자, 나환자의 아버지 최흥종 목사를 또 우리는 기억한다. 그는 무등산의 영험한 목자였으며 예언자였다. 소싯적 왈패요 깡패로 불리던 그가 예수 집안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음악 때문이었다.
“선교사덜이 광주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갖고 온 축음기가 광주 사람들에겐 최대 관심사였지라. 조그만 상자 안에서 사람의 노래소리가 나니깐 광주 사람덜이 상자 속에 사람이 들어있다 아니다, 저렇게 작은 상자에 들어갈 사람이 있겄는가 의견이 둘로 나뉘었지라. 그러자 최흥종이 끼가 발동했넌지 나가 그것을 확인해 보겄노라 선교사 집에 과감하게 들어가 뿌렀제잉.” 최목사의 제자인 김준호 선생의 후일담이다. 1911년 광주엔 국내 최초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나병원’이 개원했다. 이후 봉선동 산기슭으로 옮겨서는 전체 수용자가 600명에 이르렀다. 최흥종은 이 시설의 우두머리였는데, 나환자를 들쳐 업고 수시로 광주천을 건너다녔다. 시설은 주변의 눈총으로 여수의 애양원에 집단 이주하게 된다. 그는 노년에 의재 허백련 선생과 깊이 교류하며 무등산에 은거했는데, 성경과 도덕경을 같이 읽으며 수양을 보탰다.
무등산자락은 광주 시민들의 배고픔도 덜어주었다. 요샌 비싸서 부잣집의 호사가 되었으나, 멧돼지만큼 굵은 토종 수박이 자란다. 또 계곡엔 보리밥집이 있어 수제 동동주나 막걸리와 함께 보리 방귀의 연료를 주입해주었지. 집에 걸친 나무에 따라 보통 상호를 짓기를 ‘느티나무, 당산나무, 정자나무, 오동나무집’ 어쩌고 하던 보리밥집. 무청 쌈과 막 씻은 배추를 내오고 멸젓을 한주먹 퍼다가 놓으면 소박하되 황홀한 상차림이 된다. 한때 촌닭을 기르며 백숙집들이 늘어선 계곡은 모두 저 멀리 운림동 순환도로 근처로 내려갔고, 대대로 내려오던 밥상도 입맛따라 변하여 카페로 우후죽순 업종 변경.
2002년에 나는 증심사 주지 일철 스님과 의기투합, 환경음악회 ‘무등산 풍경소리’를 만들어 증심사를 매달 찾았다. 이른바 부주지로 소문이 났고, 부자되느니 불자되시라 했다고 이단삼단 소리까지 들었다. 당시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김인주 선생과 가수 박문옥 선생, 그리고 종교인모임 일원으로 내가 참여했다. 증심사 주차장 아스콘을 걷어내고 매달 한 차례씩 문화의 달밤이 펼쳐졌다. 우리 지역에선 만나기 귀한 분들을 모셨다. ‘산사람’의 가수 이정선, 이상은, 김두수, 한영애 씨 등이 차례차례 증심사 무대를 찾았다. 가수이자 인기 진행자 노영심 씨와 동무하며 지낼 때였는데, 토크 콘서트를 꾸리는 법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거창한 종교예식이나 특정 부류를 위한 마당이 아니라 ‘무등’이야말로 인간 세상을 정화하고 발전시켜나감을 깨달았다. 그러나 스님이 갑자기 병을 얻어 입적하시고, 나는 스스로 하산하였다. 산에서 계속 풍악을 울리는 게 선배이자 도반에게 죄스러웠다.
인생에서 포기라는 말은 배추 셀 때만 쓰는 말이라고 한다. 산을 오를 때 포기하지 말고 천천히 올라가면 목표했던 곳에 가닿을 수 있겠지. 무등산이 가까이 있어 큰 스승이렷다. 우리는 이를 ‘무등산 인생학교’라 부르자. 예서 인생살이를 된통 배울 수 있다. 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한마디로 축복이다. 높은 층수에서 살자고 고층 아파트들을 허가하여 무등산을 다 가리고 말았는데, 무등산 하나 높으면 되었지 왜들 이렇게 까치발로 서려는지 모르겠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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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 피는 마을’,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여행자의 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