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홀로 떠나는 여행
2021년 10월 05일(화) 01:00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가을에는 무작정 나선다. 동네에서 벗어나 좀 멀리 나가도 좋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어디 남도 끝자락 해남이어도 좋고, 완도나 진도여도 좋다. 가는 길에 화순이나 함평 들판도 어디도 좋겠다.

가을은 귀뚜라미 등을 타고 온다지만, 누가 뭐래도 여행 가방 메는 소리와 함께 오는 계절이다. 특별히 날을 잡고 계획을 세워 떠나기보다 가볍게 산책하듯 갈 수 있는 계절이 가을이다. 배낭 하나 둘러메고 자전거에 훌쩍 몸을 실어도 좋다.

어디로 갈까. 어디서 쉴까 큰 맥락만 잡고 떠나면 현장에서 의외의 멋진 풍광이나 감동적인 장면을 선물받을 수 있다. 거기서 쉬고 그때 방향을 잡아도 된다. 촘촘한 계획보다 여백을 충분히 두고 여행하면 훨씬 더 충만해질 수 있다.

눈과 입을 위해 여행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마음을 앞세우고 마음을 위해 걷는 여행은 더욱 좋다. 마음을 위해 콧노래도 불러 주고 마음에게 말도 걸어 보고, 그렇게 걷다 보면 마음이 풍성해진다.

함께 걸어도 좋고, 혼자 걸으면 더 좋은 가을 여행. 섬진강 강둑 어디를 걸으며 낚시 추억을 떠올리거나 영산강 이름 없는 포구에서 지나가는 배에 손을 흔들어 주어도 좋다.

눈 구경, 마음 구경의 으뜸은 단연 시골 마을이다. 애써 거둔 곡식을 자식들에게 보내려고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 작은 오이 하나라도 이웃과 나누는 모습은 그 어떤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볼거리이거니 카메라를 내려놓고 관찰자 시선을 거두고 그 일원이 되어 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히 행복하다. 고즈넉한 고샅 한 바퀴 돌고 나면 눈도 깨끗해지고 덩달아 마음도 맑아진다. 돌담에 노랗게 익은 늙은 호박이나 주렁주렁 열린 감들을 바라보며, 게을렀던 자기를 돌아보고 홍시처럼 얼굴을 붉혀도 좋을 것이다.

가던 길에 강을 만나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물멍’을 해도 좋다. 가을이 되면 물도 차가워지고 맑아진다. 물처럼 마음의 부유물들을 걷어내고 잠시 깊어지는 것도 참 괜찮겠다. 삿된 생각이나 욕망을 가라앉히면 맑아질 줄 아는 인생은 또 얼마나 정갈하고 고고한가.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고샅길을 걷는다. 누구 집 빨랫줄엔 딸이 선물한 새 옷이 걸려있고, 어느 집 처마에는 고등어 몇 마리가 매달려 있는 풍경은 언제 보아도 넉넉하다. 많이 소유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시골 사람들의 절제와 이웃 간의 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중심의 안목을 읽는다.

고샅을 걷다 보면 그리움이 따라온다. 뛰놀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요란한 물레방아 도는 소리도 쫓아온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 도회지로 가족과 이웃을 떠나보내고 홀로 된 사람들, 생의 가을을 맞이한 그들에게서 다가올 나 자신의 모습을 읽는다. 유모차를 앞세운 대문 밖 허리 굽은 할머니를 만나면, 몇 년 후 나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그러면 몇 년 후 나는 다 빠진 잇몸을 드러내며 함박 웃는다.

가을 하늘은 깊고 푸르다. 그래서 하늘을 감상하는 것도 맛이 있다. 어디 담벼락에 기대거나 의자에 앉아 보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풀밭에 편하게 누워 팔짱을 끼고 보는 것이 제격이다. 쪽빛 바다를 옮겨 놓은 하늘, 하늘을 보며 두어 시간쯤 눈을 감고 있다 보면 영혼도 파랗게 하늘을 닮는다.

낙엽을 밟으며 걷지 않으면 가을 여행이 아니다. 사각사각 낙엽을 밟으며 시인이 되어 가을 속으로 들어가 보자. 가을은 햇살과 함께하고 바람과 동행하는 여행이다. 사춘기 청년처럼 가을이 되면 여름내 억셌던 햇살은 부드러워지고, 거칠었던 바람은 순해진다. 햇살은 자기처럼 따뜻하게 살라 하고, 바람 또한 부드럽게 살라고 속삭인다.

가을은 배낭을 채우기 맞춤인 계절이다. 푸른 하늘이나 빨갛게 익은 햇살을 가득 담아도 좋고, 농촌 들녘을 가득 담아도 좋다. 욕심껏 채울수록 더욱 가벼워지는, 소담한 영혼의 순례길 가을 여행, 내 안에 자연을 닮고, 자연을 담는 시간, 오는 주말 하루쯤 만사를 내버려 두고, 기꺼이 가을맞이에 혼자 길을 나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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