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선수의 사투리
2021년 09월 07일(화) 03:00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전학생이 왔다. 매무새도 잘 갖춘 예쁘장한 소녀였다. 인사를 하라는 말에 나를 한 번 보더니, 친구들에게 곱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은 단정하고 예쁜 여학생의 등장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쩌그 해남 끄트머리에서 올라와븐 경숙이랑께, 자알 해 보더라고잉”

부드럽고 정감 있는 어투였다. 하지만 애들은 킥킥거렸고, 당황했는지 소녀는 낯을 붉혔다. 난 그를 자리에 앉히고 말했다.

“오매 허벌나게 반갑다잉. 시방 이 친구가 쓴 말은 느그덜 할배 할매들이 쓴 토백이 말이여, 오지게 반갑고 자랑스럽그만.”

아이들은 나를 보고 어찌 된 영문이냐며 고개만 두리번거렸다. 그 후, 나는 자주 역불로 사투리를 썼다. 표준어가 우수한 언어가 아님을 역설해 주고 싶었다.

시골에서 자란 나도 사투리를 써서 자주 핀잔을 받았다. 하지만 난 끝까지 사투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아버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옷이자 정신이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지역 인기 프로그램이 ‘남도 지오그래피’이다. 남도 사람들의 진솔한 삶이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좀 깊이 들여다보면 주인공은 어르신이나 풍속보다 전라도 사투리가 아닐까 싶다. 언어는 의사전달 기능 못지않게 지역 사람들의 사유와 정서를 담아낸다.

올림픽 배구 경기를 보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다른 종목들이 예상과 달리 지리멸렬한데, 여자 배구만은 달랐다. 신이 났다. 풀 세트 끝에 승리하였을 때, 두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얼마 후, 녹초가 된 김연경 선수의 말을 듣고 같은 또랑새비를 만난 것만큼 어지럼증이 일었다.

“아따 죽것다잉. 한 경기 한 경기 피가 말린다 와~”

경기를 끝내고 물을 마시며 속 시원하게 털어놓은 속마음, 힘들었다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고, 어디서 익숙하게 들었던 소리, 고향 사투리였다.

그 순간, 애써 외면해 왔던 살덩어리 같은 아릿한 아픔이 되살아났다. 동시에 그래도 끌어안고 가야 하지 않느냐는 자각, 눈물이 핑 돌았다. 애증이 묻어난 기묘한….

언어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 모양이다. 전라도의 슬픔이 담긴 사투리.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이 짓밟고 또 뭉갠 곳, 그래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친, 전라도 사람처럼 강해지고 억세진 된소리가 발달한 언어, 교묘하게 조폭들이나 식모와 같은 특수 계층 은어처럼 학대당한 토박이말, 한 곳을 자근자근 짓밟아서 모두 쾌감과 반사 이익을 얻었던 집단 광기 시대의 희생양.

숙적 일본을 꺾고, 연이어 터키와 풀 세트에서 극적으로 승리하고 4강에 안착했을 때, 우리나라도 동양인도 할 수 있다고 나는 환호작약했다. 양 팀 통틀어 최다인 28득점으로 한국을 승리로 이끈 김연경 선수는 경기 후, 환하게 웃으면서 구수한 사투리로 8강전을 마친 소감을 전했다.

“아따 죽것다잉. 한 경기 한 경기 피가 말린다 와~”

‘아따’나 ‘오매’는 반갑거나 즐거울 때, 아무 때나 쓰는 전라도 감탄사다. 죽것다는 말도 힘들다는 애교 넘치는 말이다.

제주 방언이나 함경도 방언을 우리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것처럼 전라도 방언은 전라도 사람끼리 서로 통하는 마법같이 신비로운 언어이다. 방언은 향토성이 생명이다. 그런 언어들을 어디 박물관에라도 두고 보전할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무형이라 의식적으로 사용하여 지키지 않으면 온전히 보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젊은 선수가 극적인 순간 생생하게 되살린 것이다.

만약 그 소녀가 서울말로 인사를 했으면 어땠을까. 훨씬 우아하게 보였을까? 품(品)은 입이 세 개가 모여서 된 단어이니 말이 곧 그 사람의 품격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쓰는 사투리나 표준어가 품격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왜곡되고 그릇된 시선이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과 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잘 지내자는 말, 그 여학생의 정감 있는 마음과 억양을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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