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늦게 피는 꽃
2021년 08월 23일(월) 02:00

박 용 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봄이 되면 꽃들은 경쟁하듯 피어난다. 금빛 개나리와 영춘화가 그렇고 지천을 물들이는 은빛 목련은 마치 시상대 위 메달을 목에 건 선수처럼 우아하게 핀다.

올림픽 경기도 개화는 빨리, 향기는 멀리 꼭 메달 경쟁 같다. 개나리꽃처럼 먼저 도달한 이에게 금메달을 목에 걸어 주고 환호한다. 꽃도 인간처럼 선착순이라면 모든 꽃이 봄을 향해 질주할 것이다.

올림픽을 보다 보면 승패뿐 아니라 선수들의 노력과 삶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 경기만 보면 밋밋한 그림에 지나지 않을 터인데 그들이 써 내려온 분투와 삶의 과정이 경기장에서 쏟은 투혼 못지않게 우리를 더 감동시키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배워야 할 올림픽 정신이자 인간 공부가 아닐까. 선수들의 목표가 메달이라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을 읽는 것이 우리들 목표인지 모른다.

승자의 환희 너머로 아직 피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 아쉽고 속상해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내년이든 다음해든 언젠가 활짝 피어나기를 바란다.

올림픽 종목만큼이나 꽃은 종류도 피는 시기도 다르다. 무궁화는 이름처럼 무궁하게 피고 진다. 피고 지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백일홍도 파종부터 추수까지 무려 백일동안 피고 진다. 꽃을 숨기고 딴청을 부리는 무화과는 속에서 핀다. 화무십일홍이 무색하다. 꽃은 먼저고 늦게고 다투지 않는다. 가장 늦게 피는 해바라기나 국화도 게을러서 늦게 피는 게 아니다. 아무리 날씨가 좋다고 가을 국화가 봄에 피지 않고, 성미가 급하다고 겨울 꽃이 봄에 피지도 않는다. 때를 기다렸다가 자신의 차례가 오면 어김없이 꽃대를 내민다. 순서가 아닌 질서, 순리대로 핀다. 때가 아니면 생존할 수 없기에 꽃은 자기 차례를 맞춰 핀다. 끝내 썩지 않고 시기에 따라 땅을 뚫고 나오는 힘, 꽃들이 가진 절제와 용기다. 빠르고 늦음은 순서가 아닌 인간의 시선이다. 봄꽃은 봄에, 가을꽃은 가을에 각자 최적의 생존 방식으로 핀다. 그래서 먼저도 나중도 없다. 꽃밭의 수많은 꽃들은 때가 되면 무덕무덕 피어난다. 때를 따르는 순명(順命), 꽃은 그래서 아름답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다. 고교 야구가 인기 있던 시절에 대학에 가지 못한 친구도 있었고, 대학에 갔어도 졸업할 때 프로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지 못한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40년이 지난 어느 날, 친구 부친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그들은 놀라웠다. 어떤 이는 일일 노동자로, 또 한 친구는 작은 공장 사장으로, 또 한 친구는 건설회사 부장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모두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각자 제 꽃을 피우고 있었다. 후회 없는 삶이 있겠는가마는 ‘후회는 없다’고 당당하게 하는 그 입술, 그 말에 진한 향기가 묻어났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터전에 뿌리를 내리고, 9회 말 굳세게 자신의 삶을 역전시킨 역전의 꽃들이었다.

나는 희망버스 김진숙 씨와 송경동 시인의 삶을 종종 보고 배운다. 내겐 감히 보는 것조차 경외감을 주는 사람 꽃이다. 이들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노동자 김진숙 복직 및 명예회복을 위한 청와대 앞 단식 과정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타인을 위해 우리를 위해 노동 현장을 개선하려는 그들이 피운 꽃향기에 먹먹해지곤 했다. 어느 노동자처럼 이름만 내세우거나 그깟 글 좀 쓴다고 거만한 몇몇 시인과 근본이 다르다. 선수들의 땀, 투지, 역경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 승패와 상관없이 그들의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 올림픽 정신이라면 이들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노동 정신과 작가정신 자체이자 그 혼이 피워낸 영원히 지지 않을 소금 꽃이다.

어떤 꽃도 늦게 피는 꽃은 없다. 다만 순리대로 필뿐이다. 대기만성이니 칠전팔기는 인간의 삶 속에서 핀 꽃들에게 붙이는 찬사이다. 순명을 기다려 피는 것이 꽃이라면 그 꽃은 어쩜 가장 늦게 피는 꽃, 그건 지금 내일을 꿈꾸며 치열하게 살고 있는 당신, 당신이 그 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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