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품앗이
2021년 07월 13일(화) 06:00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탁자 위에 꽃이 피었다. 꽃을 보는 아침은 눈부터 맑아진다. 누군가 마음을 이렇게 빛깔로 보냈구나. 노랗게 빨갛게 꽃으로 보낸 그도 꽃임이 분명하다.

사랑의 보답이 사랑으로 왔다. 고맙다고 꽃을 보냈으니 꽃에서 그의 향기가 난다. 아니 그에게서 꽃향기가 왔다.

꽃을 바라본다. 낮게 키 맞춤을 한다. 순금 같은 추억이 노랗게, 불타는 열정이 빨갛게 피어 있다. 가지는 그의 손가락 같고, 이파리들은 그의 입이 되어 흔들릴 때마다 나불나불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 같다. 꽃은 그렇게 몸을 흔들어 그의 색을 피운다.

꽃을 보니 그가 보인다. 난 지금껏 저 꽃처럼 어떤 색으로나마 타오른 때가 있고, 진한 향기인 적이 있던가. 아니 그처럼 누군가에게 진하거나 뜨거운 순간이 있었던가. 꽃을 보며 꽃 속의 그를 바라본다.

꽃을 조심조심 만진다. 그와 순하게 눈 맞춤을 한다. 꽃이 웃는다. 그가 살포시 웃는다. 우는 꽃을 본 적이 없다. 제일 어려운 일이 항상 웃는 일일진대 꽃은 언제나 웃고 있다.

꽃은 자리도 탓하지 않는다. 궁색한 탁자나 옥상 구석에도 엉덩이를 붙인다. 산속이나 들판, 논둑이나 장독대에서도 가리지 않고 팔베개한다. 녹슨 철모를 뚫고 올라오고, 자동차 바퀴 틈새에 핀다. 아스팔트 갈라진 틈새도 자리를 잡는다. 물 위에서 수련은 더욱 우아하고, 백년초는 사막에서 피어 더욱 아름답다. 발길에 밟히면서도 질경이는 포기하지 않고, 지린내 속에서 노루오줌은 꽃말처럼 쑥스럽게 핀다. 평생 좋은 자리만 탐했던 나는 이 여린 식물 앞에서 더없이 작아진다.

꽃이 방긋 웃으니 나도 덩달아 웃는다. 꽃이 내가 되고, 내가 꽃이 되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인들 어떠랴. 그이의 동백꽃을 내 볼에다 옮겨 붉게 피우고도 싶고, 살구꽃이 되어 그이 마당 앞을 훤하게 밝히고 싶다. 장독대 밑에 봉숭아처럼 피어 누이의 말동무가 되어주고도 싶고, 집 뒤뜰 담장에 호박꽃으로 피었다가 그이 저녁 밥상에 뜨끈한 된장국 호박 건더기가 되고도 싶다. 무덤가 망초로 피어 무덕무덕 닿고 싶고, 집현전 뜰에 ‘곶’으로 내려앉아 자음 모음을 팡팡 퍼뜨리고도 싶다.

꽃에도 눈 코 입이 있다면, 진달래나 벚꽃처럼 보고 탄성이 절로 나면 봄꽃이다. 봄꽃은 대개 입으로 반긴다. 여름꽃은 색이 진해서 눈으로 만진다. 장미나 해바라기처럼 원색의 아름다움 속으로 훅 빨려 들어간다면 여름 꽃이 맞다. 가을꽃은 향기가 진해서 국화나 구절초처럼 눈을 감고 코를 가져다 대지 않으면 가을꽃을 대하는 예의가 아니다. 겨울 꽃은 마음속에서 피는 꽃이라서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야 얼굴을 보이는 귀하디 귀한 꽃이다.

나이를 먹으면 사람도 꽃이 된다. 잔대나 도라지 뿌리가 굵어지고 고구마도 토실해지듯 사람들도 가을이 되면 그간 살아온 삶의 향기도 짙어진다. 오래될수록 향기로운 것도 사람이다. 청렴한 이는 시궁창에서도 되레 맑고 향기로우며,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리 삶이 척박할지라도 맑게 살고 맑은 향기로 말한다.

꽃은 누구나 좋아한다. 꽃도 좋고 향기도 좋고 사람도 좋은 것이 꽃 선물이다. 꽃 품앗이를 해도 좋겠다. 주거니 받거니 꽃이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그가 꽃을 보내 꽃으로 왔으니 이번엔 내가 꽃이 되어 가야겠다. 뒷산 할아버지도 뵙고, 고향집 어머니에게도 가고, 멀리 간 친구도 만나고 싶다.

꽃으로 가려면 내가 먼저 씨앗이 되어야겠다. 화분 속에 들어앉아 고운 향기를 만들 일이다. 맑은 마음 없이 어찌 꽃이 되고 향기가 나랴! 난 꽃이 되는 중이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미소와 향기뿐, 그의 가슴에 씨앗이 되어 움틀 날만 기다린다. 그의 체온으로 피어나고 그의 온도가 날 키우리라. 그의 가슴에 안겨 그의 꽃으로 피고 싶다. 어둠을 뚫고 바위를 뚫고, 맑고 향기롭게 피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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