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만 천 번째
2021년 06월 28일(월) 02:00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녀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너 바람둥이였어.” 그녀 말이 너무 황당해서 그 이유를 묻자 “너의 첫사랑이 나 아니었느냐”며 당차게 말끝을 올린다.

무슨 일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그녀는 이웃 마을 친구가 “걔는 첫사랑이 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우기더란다. 그러면서 그녀는 너의 첫사랑이 나 말고 도대체 몇 명이냐며 따지듯 언성을 높였다.

50년이 지나도 식지 않은 첫사랑. 나는 그녀가 아직도 유년의 풋풋한 기억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누군가의 첫사랑이 자기였다는 것보다 뿌듯하고 더 가슴 설레는 일이 어디 있던가.

우리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고 그리고 내 첫사랑이 꼭 너만은 아니었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몽상은 오래도록 간직해도 나쁘지 않은 추억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친구와 직업, 사랑에 대한 성장통을 겪고 자란다. 나도 그랬다. 우정과 진로는 그럭저럭 알 것 같은데. 엄두가 나지 않게 센 놈이 사랑이었다. 어머니와 결별하고 제일 먼저 이웃집 아이를 좋아했다. 그리고 이웃 마을, 그다음은 읍내 아이였다. 도시로 진학을 하면서 사랑의 지평도 넓어졌다. 특히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순수함이나 발랄함 같은 외모에서 벗어나 내면을 중심으로 더욱 넓어지고 깊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랑은 더 심오했고 더욱 알 수 없었다.

일상이 늘 신비로운 탐험이다. 자연이든 인간이든, 새로운 세상과 매일매일 만나는 것이 삶이리라. 비행선을 타고 우주를 탐험하듯 신비로운 인간, 아니 개성 넘치는 인간을 탐험하는 것이 인생인가 싶다. 어떤 이는 구경하고 어떤 이는 탐색하고 또 어떤 이는 부딪쳐 본다. 나는 누구를 가리지 않고 가능한 세 번째 길을 택했던 것 같다.

삶이 탐험이라면 이왕 자연보다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게 좋겠다고 여겼다. 수많은 사람이 작달비처럼 지나갔듯, 수많은 사랑도 소낙비처럼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탐색이 끝났을 때, 조금이나마 그에 대한 연민이 남는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여겼다. 사랑의 무게는 오직 마음의 저울로만 잴 수 있었다. 진실해, 꿋꿋해, 따뜻해.

내가 우주를 여행하는 지금, 나에게 동력이 되고 에너지가 되어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검은 바다에 신비롭게 빛나는 별이자 섬, 호기심이 있어서 나는 암흑의 바다를 헤쳐나갈 수 있었다. 넓은 바다에 떠서 제 고유의 색채를 지닌 섬, 푸른 별 노란 별 반짝반짝 빛나는 그 별이 바로 각기의 사람이고 그 사람의 사랑이 가슴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니 하나하나 만나는 사람마다 각각의 색채를 가진 별이고 섬이며, 그 별과 섬들을 사랑하는 것 또한 언제나 첫사랑일 수밖에 없었다. 매번 첫사랑이고 매번 설렘이었다. 두 번째 서른을 코앞에 둔 난 지금껏 오백 번 정도 그런 빛나는 별을 만났던 것 같다.

매 학기 초, 새 교실에 가득 앉아 있는 친구 별들을 호기심 가득히 바라보았다. 어느 별은 쉽게 자신을 보여 주었지만 어떤 별은 꼭꼭 숨기고서 학년이 끝나도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새 학년이 되었고 그렇게 더 높은 우주를 탐험하면서 나는 조금씩 더 성장했다.

사랑도 그랬다. 처음엔 이성 간의 사랑만 사랑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넓은 우주로 항해할수록 가족 간의 사랑, 친구를 위하는 마음, 이웃과 인류를 위한 사랑이 중요함을 느꼈다.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타인을 위해 손톱만큼이나마 헌신할 수 있었다면 그 힘은 오직 첫사랑이었다. 묘하게도 사랑은 퍼 줄수록 많아졌고, 세월이 지날수록 젊고 예뻐졌다.

그런데도 가도 가도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인간이라는 각각의 행성이었다. 인간이라는 별 하나하나가 거대한 우주이자 블랙홀이었다. 그러니 내 첫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언젠가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는 자기만이 첫사랑이라고 명토 박으려 할지 모른다.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라고, 아직 출발도 못 한 우주 여행이 오백 번, 시작조차 안 한 첫사랑이 오백 번이나 남았다고, 그녀에게 당당히 말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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