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메뉴 인생
2021년 05월 31일(월) 06:00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팀을 짜는데 쉽지 않았다. 경기에서 지고 싶은 사람은 없나 보다. 친목 경기임에도 잘하는 사람과 팀을 이루려고 했다.

라운딩을 끝내고 승진한 친구가 한턱내겠다고 해서 식당으로 향했다. 세트 메뉴를 시켰다. 얍삽한 상술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지만, 다수의 입맛을 고려했다. 다양한 음식이 시차를 두고 나왔다. 나오는 종류에 따라 선호도 차이가 있었다. 탕수육이 나오자 돼지고기를 못 먹는 친구는 상을 찌푸렸고, 생선을 잘 먹지 않은 나는 새우에 젓가락을 내밀지 않았다. 골라 먹는다고는 했지만, 친구가 내 입에 싫어하는 음식을 밀어 넣어줄 때는 속이 개운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트 메뉴는 어느 것은 버리고 어느 것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경기도 공격과 수비가 하나의 세트였다. 불리하다고 나만 두 번 치거나 우리 팀만 선수를 더 많이 기용할 수도 없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나면 헤어지듯 우리 삶 곳곳이 세트이다. 김과 간장, 상추와 된장, 국과 밥이 짝을 이룬 밥상 같다. 젓가락과 숟가락도 한 세트이고 젓가락에는 김치가, 숟가락에는 국이 일종의 세트로 묶여 있다. 배가 고파 본 사람만이 포만감도 느끼고, 배부른 이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일지라도 맛을 모른다. 허기와 포만도 세트다.

일상생활도 대부분 묶음이다. 자고 일어나는 것과 출근과 퇴근이 그렇고, 말하기와 듣기나 먹는 것과 배설도 세트이다. 만남과 이별, 사랑과 증오, 눈물과 웃음이 그렇고 행과 불행, 승과 패, 기쁨과 슬픔이 그러하며 무엇보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어서 어느 하나는 버리고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

꽃이 피고 지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 낮과 밤의 순환도 세트이다. 매일 옷을 입고 벗는 일이며, 버스를 타고 내리는 행위를 반복하고 아파트 오르내리기 역시 세트이다. 두 눈과 두 귀, 두 팔과 다리 역시 한 세트로 움직인다.

우리 내면에도 많은 세트가 들어있어서 선과 악, 미와 추, 사랑과 증오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는 버려야 해서 어느 시인은 저쪽 길을 ‘가지 못한 길’이라고 아쉬워한 것처럼 잘 선택하기 위해 고민하되, 잘못 선택한 것에 미련과 후회를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삶이기도 하다.

친구가 승진할 수 있었던 것도 앞 사람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그도 자리를 비우고 스스로 하산하지 않으면 절벽에서 떠밀릴 것이다. 나아감과 물러섬은 한 묶음이어서 그도 녀석들과 함께 지금의 자리에 있을 날이 실은 멀지 않다.

삶이 세트라고 해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수많은 시간, 밤과 낮, 그리고 수많은 계절이 주어진다. 따라서 자신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더 많은 행복, 더 좋은 이별, 더 나은 즐거움과 웃음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인생 메뉴이다.

무엇보다 내가 상대의 가장 빛나고 좋은 짝이 되어 주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도 없다. 잘 사는 부부가 그렇다. 상대를 낮추거나 밉게 보면 자기도 함께 낮아지며 밉보이고, 상대를 떠받치고 예쁘게 보면 자신도 덩달아 높아지고 예뻐 보이는 것이 세트의 특성이다. 그러니 가능하면 아름다운 쪽에, 웃는 쪽에, 행복한 분야에, 착한 부류에 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잘 살면 잘 죽는다. 한 조각, 한 치도 허투루 선택하지 않고 최선의 조합을 세트로 만들어 가며 사는 것이 좋다. 내 삶이 빛날 때, 죽음은 더욱 빛이 난다. 내가 진실로 삶을 사랑했을 때 시련도 문제 될 것 없고, 죽음도 당당하게 맞이한다. 나로 인해서 내가 속한 세트가 밝은 쪽,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생의 세트를 만들어 나아가는 길.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고 노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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