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겸 총리가 둘러 본 5명의 열사는 누구?
2021년 05월 18일(화) 21:00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망 박현숙
투사회보 제작 들불 열사 박용준
41년만에 사진 찾은 아이 전재수
윤상원과 도청 최후 항전 김동수
김부겸 총리 민주화동지 나병식
41주년 5·18민주화운동 정부기념식이 끝난 뒤 김부겸 국무총리가 둘러본 박현숙, 박용준, 전재수, 김동수, 나병식 등 5명의 열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날 정부의 공식 대표로 기념식에 참석한 김부경 총리는 기념식이 끝나고 5·18민주화운동 유족회장과 광주지방보훈청장의 안내를 받으며 열사들의 묘소를 참배했다.

애초 3명의 열사를 참배하기로 했다가 추가로 2명의 열사 묘지를 더 둘러본 것이다.

김 총리가 첫번째로 들린 박현숙(18·1980년 당시 송원여상 3학년)열사는 주남마을 버스 총격의 희생자이다.

박 열사는 항쟁 기간 계엄군 총격에 숨진 시민군들의 시신을 정갈하게 수습해 입관하는 일을 도왔다고 한다. 1980년 5월 23일, 옛 전남도청 지하실에서 시신에 묻은 피와 오물을 닦던 중 관이 부족하자 화순으로 관을 구하러 갔다. 화순 방향 버스를 타고 주남마을을 지날 때, 계엄군이 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박 열사는 일곱 발의 총알에 맞아 숨졌다.

두번째로 발길을 옮긴 곳은 박용준 열사의 묘역이었다. 박용준 열사는 들불야학 윤상원·박관현·박기순·신영일·김영철·박효선 열사와 함께 5·18 민주화운동을 이끈 ‘들불 열사’ 7인 중 한 명으로 계엄군의 광주 만행을 알린 ‘투사회보’의 글씨를 직접 쓴 것으로 유명하다. 박 열사는 고아원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구두닦이를 하면서 야간고등학교 졸업하고 광주신협에 취직했다. 이후 1979년 들불야학과 인연을 맺어 교사로 활동했다. 들불야학 강학생 시절 그는 교재나 나무도장, 간판 제작을 도맡을 만큼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그는 1980년 5월27일 YWCA 건물을 지키다 최후진압 작전에 나선 계엄군 총탄에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김 총리 등이 세번째로 들린 묘역은 41년 만에 ‘잃어버린 얼굴’을 찾은 전재수 군의 묘역이다. 전 군은 1980년 5월 24일 남구 진월동 마을 앞 동산에서 친구들과 놀다 주둔군과 출동 병력 간 오인 사격 과정에서 총탄에 맞아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았다. 당시 총소리에 놀라 친구들과 도망치던 전 군은 며칠 전 생일 선물로 받은 고무신이 벗겨져 주우러 돌아섰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

이렇게 3인의 열사는 김 총리가 참배하기로 예정돼 있었으며, 이후 2인의 열사가 추가됐다.

김 총리는 전재수 군 묘역을 방문한 뒤, 인근에 지선스님과 인사를 나누던 중 스님의 안내로 김동수 열사를 찾았다. 김 열사는 윤상원 열사와 함께 5월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시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김 열사는 1980년 당시 조선대 3학년으로 대학생 불교연합 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김 총리의 마지막 참배지는 나병식 열사의 묘지였다. 나 열사는 김 총리가 생전에 같이 민주화운동을 했던 동지의 인연이 있다며 개인적으로 꼭 들렸으면 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나 열사는 1980년 5월17일께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청년학생 주동자로 지목돼 서울 마포구 망원동 대로변에서 마포경찰서로 강제연행돼 다음날 오전에 합수부로 이송돼 구금됐다. 이후 역사서인 ‘한국민중사 1·2’에 5·18민주화운동 부분을 저술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위반죄가 적용,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형을 받은 적도 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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