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무게, 인간의 무게
2021년 05월 18일(화) 07:00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잘난 사람도 못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 맹상군의 수레바퀴처럼 둥글둥글게 생긴 돈, 부귀공명이 붙은 돈, 이놈의 돈아, 아나 돈아,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느냐 얼씨구나 절씨구 돈돈돈 돈 봐라.”

매품을 팔기로 하고 맷값으로 닷 냥을 받은 흥부가 즐거워하는 대목이다. 매를 맞다 죽을 수도 있으련만 좋아하는 흥부 모습에서 가난으로 인한 고달픔이 느껴진다. 오백 년 동안 신처럼 신봉하고 숭배했던 삼강오륜이 단돈 닷 냥에 짓밟히는 장면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만큼이나 웃프다.

피천득의 수필 ‘은전 한 닢’은 오랫동안 동냥으로 어렵사리 은전 한 닢을 모으고 스스로 대견해서 눈물을 흘리는 어떤 거지 이야기다. 거기서 거지의 마지막 발언이 반전이다. 그냥 은전 한 닢이 갖고 싶었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하거나 무엇에 쓰기 위함이 아닌 거지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좋을 텐데, 그냥이란다. 은전 한 닢을 갖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그런데 목적이 없단다. 은전 한 닢을 가졌을지라도 목적 없는 소유는 여전히 거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상거지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어디 거지만 그런가. 정신이 한없이 가벼운 거지는 우리 인간 소유욕의 민낯이 아니겠는가.

돈이 생기면 마땅히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 사이에 조율을 잘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흥부와 거지를 통해 돈을 천박하게 보지도 말고 너무 경외하지도 말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어렵사리 모은 전 재산을 대학에 기부한 노부부의 미담이 들려온다. 자신이 보유한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 85%를 기부하기로 약속한 워런 버핏이 해마다 보건 의료 개선과 극빈층 빈곤을 위해 꾸준히 약속을 실천하고 있다는 소식도 반갑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상속인들이 한 기부와 상속세 신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인다. 인간이 돈에 구속되지 않고 할 수 있는 돈에 대한 바른 생각, 예의를 갖춘 품격 있는 자세이다. 인간을 평가하는 데 몇 안 되는 돈의 좋은 기준이 쓰임새이다. 그런 면에서 엄청난 액수의 비자금을 숨겨놓고도 ‘전 재산이 29만 원’ 운운하며 골프를 치고 호의호식하는 전두환을 보면 분통이 치민다. 은전 한 닢의 상거지보다 더 천박하고 비루한 그에게서 한없이 가벼운 돈의 무게를 느낀다.

요즘 청춘남녀들이 돈이 없어서 사랑을 못 하겠다는 것을 보면, 젊은이들에게 돈은 영혼의 해방자가 아니라 정복자인 셈이다. 우린 돈 앞에서 워런 버핏을 꿈꾸면서 두 발은 비굴하게 전두환을 향해 가는지도 모른다.

60년대를 건너온 사람들 대부분은 돈을 저축하는 법만 배웠지, 어떻게 잘 쓰는지에 대해서 배우지 못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잘못된 조선 시대 근대화 시대의 관념이 대못처럼 단단하게 박혀 있다. 그런 면에서 흥부나 전두환보다 백석과 김영한의 삶을 통해 돈의 무게를 헤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함흥의 여고 영어 교사로 재직하던 백석은 회식 자리에서 만난 기생 김영한(자야)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여자야.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다고 선언한다. 그런 그를 본 백석의 부모는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버리지만, 백석은 그녀에게 만주로 달아나자고 제안하고, 먼저 가 있으면 뒤따라올 것으로 생각하고 홀로 만주로 떠난다. 반면 자야는 백석의 장래에 해가 되지 않도록 만주행을 포기한다. 해방되어 백석이 함흥을 다시 찾았을 때, 자야는 이미 서울로 떠난 후였고 이번에는 휴전선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잠깐의 이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을 아무도 몰랐다.

북에 남은 백석은 1996년 쓸쓸히 죽고, 서울에서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한 자야는 큰 부자가 되어 홀로 살면서 백석의 시집을 내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그리고 죽기 전에 1000억 원 상당의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다. 많은 사람이 찾는 맑고 향기로운 사찰, 길상사다. 백석이 ‘나와 나타사와 당나귀’라는 시를 통해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않았듯이 자야도 평생 백석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했다. 그녀가 1999년 세상을 떠나면서 백석을 떠올리며 했다는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1000억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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