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아버지의 술잔은 절반이 침묵
2021년 03월 23일(화) 08:00
혼자 술 마실 때가 많아졌다. 혼자 마시면 여럿이 마실 때보다 훨씬 가슴 깊이 술이 내려간다. 그래서 뜨겁다. 목을 타고 사르르 내려가는 감촉을 느끼는 순간, 그 술은 순간 심연에 감춰진 선친(先親)의 목으로 흐르고, 그러면 어느새 나는 아버지와 잔을 나누고 있다.

아버지는 늘 뒤처져 걸었다. 앞서는 법이 없으셨다. 농사는 거개 밤이 늦도록 했고, 일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면 아버지 등 뒤로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르곤 했다.

달을 한 짐 지고 오시는 아버지, 금가루 같은 달빛을 밟으며 아버지 그림자가 이끄는 대로 고단하게 돌아오곤 했다. 힘들지 않는 시대가 있었겠는가마는 오늘날에도 자식들의 화려한 주연 무대가 끝나고, 조연으로 사모곡까지 끝난 후, 무대 뒤편에 아버지만은 관객처럼 쓸쓸히 앉아 계신다. 늘 표정 없이 그리고 말도 없이, 아버지는 왜 마지막 장면까지 혼자 계신 걸까.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 / 들국화도 수줍어 샛노랗게 웃는다 / 그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 아 테스형 아프다 /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 세월은 또 왜 저래”

대중가요, 막걸리 한잔에 테스형을 듣고 있노라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술잔에 어른거린다. 이 시대 50∼60대 남자들에게 슬픔과 아쉬움, 애잔한 연민을 불러오는 울컥한 언어가 아버지다. 그래서 아버지 흉내를 내서 홀로 술잔을 비우고 눈이 벌게지도록 울고 나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버지 하면 술잔과 눈물이 떠오르는 것은 아버지 이름 속에 우리의 슬픈 현대사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을 지켜야 했기에 앞섰거나 또는 앞설 수 없었던 고단한 아버지들. 당신들의 굴곡진 삶이 등으로 굽은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가난과 회한 그리고 이념을 한꺼번에 불러내는 일이기에 아버지에 대한 호명은 그 시대를 불러내는 것만큼 아프다.

“어렸을 때 겪은 일이지만 난 아주 기분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다. 6·25가 터지고 나서 우리 고향에는 한동안 경찰대와 지방 공비가 뒤죽박죽으로 마을을 찾아들었다. 어느 날 밤 경찰인지 공빈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우리 집까지 찾아 들어와 어머니하고 내가 잠들고 있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전짓불을 얼굴에다 비추며 어머니더러 당신은 누구의 편이냐는 것이었다.” (이청준 ‘소문의 벽’)

아버지들은 해방과 미군정 그리고 한국전쟁의 어느 매듭을 거쳤던 세대이다. 가난보다 더 비참한 여순사건과 4·3이라는 대립과 반목, 5·16 쿠데타와 지독한 유신, 전두환 독재를 굴욕적으로 견뎌내야 했던 악몽과 몸부림이 들어 있다. 너무도 잔인해서 인간의 내면을 파괴해버린 것들, 지금은 휘발해 버리고 덮여 버린 강요와 몰살, 그 속에서 침묵이 유일한 방법이었던 고통스러운 삶의 고뇌가 술잔에 들어 있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가족을 살피느라 앞서는 법이 없었고 섣불리 선택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뒤에서 가족이 무사히 앞길을 헤쳐 나갈 때까지 벙어리 호위무사가 되어 위험을 지키는 존재 말이다.

아버지의 술잔을 보며 모름지기 이 땅의 주인이 누구였고, 누구였어야 했는가를 생각해 본다. 늘 뒷전에 물러섰던 우리들의 아버지, 그들의 술잔은 절반은 한숨이고 나머지 절반은 침묵이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 광풍이 휘몰아쳤던 시대,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모나 자식에 대한 미안함을 침묵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들이었으리라.

아버지, 이제 대부분 생을 마감하고 마을 뒷산에 계시거나 생존해 계시다면 증조할아버지가 되었을, 회오리쳤던 강줄기를 건너온 남자들, ‘남아일언 중천금’으로 침묵을 강요받았던 이 시대 대부분의 입이 없는 아버지들을 술잔 속의 한숨과 회한 그리고 침묵으로 읽는다.

오늘도 혼자 술을 마신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 삶을 읽는다. 눈물과 침묵으로 가득한 아버지 술잔이 피안의 세계에서는 이야기꽃, 웃음꽃으로 넘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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