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병풍’
2021년 01월 12일(화) 05:00 가가
“온 천하가 얼어붙어서 찬 돌과 같이도 딱딱한 겨울날의 한가운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은 아무 소리도 없이 한들한들 춤추며 내려오는 것인지.” 목포 출신 수필가이자 독문학자인 청천(聽川) 김진섭은 1939년 월간 종합 잡지 ‘조광’(朝光)에 발표한 ‘백설부’(白雪賦)에서 눈 내리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백설을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요, 바람의 희생자’라 했다. 또한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는 백설,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라고도 했다. ‘도회인’으로서 눈을 관조적·서정적으로 바라본 것이다.
한겨울 혹한을 묘사한 또 다른 글을 읽어 본다.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가 지난 2000년 출간한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열림원 펴냄)에 나오는 내용이다. ‘책만 읽는 멍청이’(간서치, 看書痴)라고 불렸던 조선 정조 때 실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 선생의 글을 모은 책이다. “내가 거처하던 작은 띳집이 몹시 추웠다. 입김을 불면 성에가 되곤 해, 이불깃에서 버석버석하는 소리가 났다.” 결국 엄동설한에 ‘한서’(漢書) 한 질을 이불 위에 늘어놓고, ‘논어’ 한 권을 뽑아 세워 황소바람을 막아 얼어 죽기를 면하는 한 서생(書生)을 상상해 보라.
폭설을 동반한 ‘북극 한파’가 지난 주말 한반도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광주·전남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 눈이 펑펑 쏟아지고, 영하 10~20도의 한파가 몰아쳤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지난 6일부터 11일까지 전국에서 수도계량기 7207건, 수도관 314건이 동파 피해를 입었다. 또한 시설감자와 다육식물 등 농작물이 동해를 입었고, 양식장에서 키우던 숭어도 동사했다. 아득하게 먼 북극의 위력이 코앞에 불쑥 닥쳐온 듯한 느낌이다.
동식물이나 인간 모두에게 한겨울 추위는 매섭다. 오히려 식물은 겨울을 나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머지않아 봄은 찾아오고 눈 속에서 복수초(福壽草)는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우리 역시 조금은 여유를 갖고 주변의 소외된 이들을 보살피며 ‘마음은 따뜻한’ 겨울나기를 하면 좋겠다.
/송기동 문화2부장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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