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주의를 넘어서는 가족 공동체를 생각한다
2020년 12월 21일(월) 08:00 가가
사람 사는 이야기 대부분은 ‘가족’에 관한 것이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우리가 처음 만나는 세상이 곧 가족의 모습이며, 싫든 좋든 태어나고 보면 누구나 이미 특정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성장을 위한 기초적·물질적 보살핌을 제공하는 것도 가족이다. 그럼에도 가족의 의미는 늘 막연하고 유동적이며, 가족관계는 왜곡과 균열이 상존하는 불안한 관계다.
사실 ‘완벽한 가족관계’는 애초에 불가능한 소망이라는 것을 알지만, 가족을 운명이라고 믿고 싶어 하며, 그 믿음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을 건강한 자세라고 뒤집어 말한다. 그래야 가족의 형태와 구성 조건에 따라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결손과 완전의 형태로 분리하기가 쉬우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왜 이렇게 가족에 집착하는가? 개인으로 사는 것이 쉽게 허용되지 않기 때문 아닐까? 결국 개인으로서는 제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 가족은 일차적으로는 ‘나’를 위해서 필요한데, 무엇보다도 다른 어떤 사회적 관계도 담당하지 못하는 순기능을 담당한다. 가족은 사회관계나 조직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나눌 수 있게 하는 보호막 역할을 한다. 때로는 비합리적인 감정의 표출을 해도 비난이 아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어느 정도의 나약함, 부족함을 통해서 오히려 상호 의지를 한다.
그런데 이런 가족의 의미에 기대어서 가족이야말로 사회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고 여긴다. 이 지점에서 가족의 가치는 쉽게 변질 왜곡되어 일방적으로 신성시되거나 이념화되기 쉽다. 말하자면 가족의 가치가 이용당하고 변형되어서 가족주의 또는 가족 절대주의로 나가며, 가족 같은 관계를 내세우는 많은 사회적 관계와 조직들은 ‘절대 반지의 권력’을 쉽게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가족적인 관계, 가족 같은 사이라고 말하면 한순간에 믿음과 친밀감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그리고 가족주의가 놓은 가족의 덫을 알지만 못 본 척한다. 사회적 영역에서 보호막 역할을 하는 가족관계를 무의식적으로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상호 간에 보호와 결속력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주장과 판단을 차단하고, ‘우리끼리’라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도, 직장도, 심지어 동창회나 동호회 등등에서도 관계의 가족화를 추구하며, 개인의 독립성은 억압된다. 가족적 가치를 앞세우는 가족주의의 문제는 실제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가족주의의 더 큰 문제는 그 뿌리를 가부장제와 연고주의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주의는 그래서 ‘당신들의 천국’을 위해서 강하고 영웅적인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며, 족보 없는 ‘아무나’가 아닌 연고가 확실한 사람들끼리의 가족관계를 견고히 하는 것이다.
가족주의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 현상이다. 여기에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족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농축되어 있고, 그 본질은 역사 속에서 세대를 걸쳐서 반복되어 온 삶의 고난과 척박함일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영역에서 지배적인 힘을 휘두르는 가족주의는 가장 위험한 병리적 현상을 보인다. ‘나’의 조직과 관계는 절대적이라는 가족주의는 착각일 뿐이며 가족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다. 가족은 서로 공동체적 가치를 배우고 서로를 독립적인 주체로서 성장하도록 돕는 책무를 다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완성하며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진짜 ‘가족’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조직의 명분을 위해서, 조직의 기득권과 힘을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장렬하게 싸우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일까? 자신의 조직과 가족만을 잘 건사하면서 먹여 살리기 위해서 분투하는 그런 거대한 아버지의 우상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가부장적 아버지보다는 우리 모두가 공동체적 관계의 일원으로서, 조직의 안위와 유지보다는 공동체의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이 절실하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 그런 새로운 시작을 설계하기에 참 좋은 때 아닌가.
누군가 우리에게 가족적인 관계, 가족 같은 사이라고 말하면 한순간에 믿음과 친밀감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그리고 가족주의가 놓은 가족의 덫을 알지만 못 본 척한다. 사회적 영역에서 보호막 역할을 하는 가족관계를 무의식적으로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상호 간에 보호와 결속력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주장과 판단을 차단하고, ‘우리끼리’라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도, 직장도, 심지어 동창회나 동호회 등등에서도 관계의 가족화를 추구하며, 개인의 독립성은 억압된다. 가족적 가치를 앞세우는 가족주의의 문제는 실제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가족주의의 더 큰 문제는 그 뿌리를 가부장제와 연고주의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주의는 그래서 ‘당신들의 천국’을 위해서 강하고 영웅적인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며, 족보 없는 ‘아무나’가 아닌 연고가 확실한 사람들끼리의 가족관계를 견고히 하는 것이다.
가족주의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 현상이다. 여기에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족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농축되어 있고, 그 본질은 역사 속에서 세대를 걸쳐서 반복되어 온 삶의 고난과 척박함일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영역에서 지배적인 힘을 휘두르는 가족주의는 가장 위험한 병리적 현상을 보인다. ‘나’의 조직과 관계는 절대적이라는 가족주의는 착각일 뿐이며 가족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다. 가족은 서로 공동체적 가치를 배우고 서로를 독립적인 주체로서 성장하도록 돕는 책무를 다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완성하며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진짜 ‘가족’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조직의 명분을 위해서, 조직의 기득권과 힘을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장렬하게 싸우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일까? 자신의 조직과 가족만을 잘 건사하면서 먹여 살리기 위해서 분투하는 그런 거대한 아버지의 우상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가부장적 아버지보다는 우리 모두가 공동체적 관계의 일원으로서, 조직의 안위와 유지보다는 공동체의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이 절실하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 그런 새로운 시작을 설계하기에 참 좋은 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