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입술로 더 많은 ‘오월’을 들려주세요
2020년 12월 16일(수) 06:00

김미은 편집부국장 겸 문화부장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 시간. 기립 박수 속에 배우들이 나와 인사를 하는데, 젊은 남자 배우 한 명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1980년 현장에서 죽은 친구의 이름을 외치며 역시 도청에서 최후를 마친 야학생 역할을 한 배우였다. 교련복 차림의 그는 눈이 벌게져 있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 후에도 그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었고 같이 울컥해지고 말았다. 이날 출연자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이다. 혼자 생각해 봤다. 저 배우의 눈물 속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지난 주말 빛고을시민문화회관에서 열린 5·18 소재 뮤지컬 ‘광주’ 공연 현장. 서울·전주 등에서 50여 차례 상연된 후 광주로 이어진 무대는 ‘80년 오월’ 마음 따뜻했던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노래와 이야기로 풀어냈다.

젊은 배우의 눈물을 보고 있자니, 몇 년 전 마주했던 중년 배우의 눈물도 떠올랐다. ‘광주’와 마찬가지로 고선웅이 연출했던 오월 연극 ‘푸르른 날에’ 뒤풀이 현장에서였다. 대학로에서 활동 중인 50대 중반의 그는 광주에서 첫 공연을 마치고 숙소까지 걸어가는데 줄곧 눈물이 흐르더라고 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광주 사람 한 명 한 명이 다 달라 보이고,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2011년 초연 때부터 참여했으니 이미 100번도 더 넘게 출연한 작품이었지만, 광주 공연은 베테랑 배우에게도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 듯했다.

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모두들 오월이 광주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전국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길 늘 염원했기에, 그 어느 해보다 많은 행사가 기획됐다. 문화예술계도 여러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터졌고, 그 많던 기획이 취소되거나 축소되고 말았다.

전국에서 모인 518명의 시민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장엄한 ‘교향곡 2번 부활’을 연주하는 광경과, 폴란드 크라쿠프 스타리 국립극장이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각색한 ‘더 보이 이스 커밍’(The Boy Is Coming)을 만날 수 없었던 점은 지금 생각해도 못내 아쉽다.



배우들이 흘린 저 눈물의 의미는

그러나 힘든 상황 속에서도 문화예술계의 움직임은 간간이 이어졌다. 전시 중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별이 된 사람들’(2021년 1월31일까지) 전이 인상적이었다. ‘예상 가능한 뻔한 작품’에서 벗어나 새로운 해석과 시각으로 풀어낸 작품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또 생태·환경·소통 등으로 담론을 확장시키며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 낸 점도 흥미로웠다.

5·18 40주년 기념식에서 선보인 ‘내 정은 청산이오’라는 영상 속의 ‘노래’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나를 붙잡지 못한 걸 후회하지 말아요/ 날 기억해 주는 것 그걸로 되었소/ 언제 우리 웃으며 또 만날 건지/ 그때까지만 그대여 부디 잘 계시오.” 윤상의 ‘달리기’ 등을 작사한 박창학이 가사를 쓴 이 노래는 가수 정훈희의 청아하고 아련한 목소리에 실려 긴 여운을 남긴다. 영화 ‘기생충’의 음악감독 정재일이 편곡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선율과 그가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도 감동을 더한다.

인디언 구전 시를 번역한 가사에 작곡가 김효근이 멜로디를 쓴 ‘내 영혼 바람 되어’는 “그 곳에서 울지 마오/ 나 거기 없소”로 시작되는 노랫말이 인상적인 곡인데, 세월호 추모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정훈희의 노래도 앞으로 그렇게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음원이 널리 보급돼 오월에는 물론이고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사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곡으로 ‘언제까지나’ 들려지고, 불려지길 소망해 본다.



뮤지컬 '광주'와 정훈희의 노래

‘오월 광주’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다뤄질 것이다. 오월 작품을 제작한 이들을 만나 보면 드는 소회가 있다. 시대와 삶의 현장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술가들에게 오월은 ‘영원한 숙제’라는 생각이다. 또한 광주 사람들에게는 어느덧 무덤덤한 일상처럼 느껴지는 ‘5월’이, 외지 예술가들에게는 한없는 장엄함과 무게감으로 다가가는 것 아니냐는 느낌도 든다.

어찌 됐든 앞으로 펼쳐질 오월 이야기는 항쟁에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거나 너무 극적인 서사로 나아가기보다는,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여백이 많은 작품, 사람들의 마음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작품으로 형상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다시, 그날의 뮤지컬 ‘광주’ 공연 현장. 이날 무대가 마지막 출연이었던 어느 여배우가 커튼콜 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작품을 준비하고 무대에 올리면서 내 입술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생각했다.”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당신들의 입술로, 당신들의 몸짓으로, 당신들의 노래로, 당신들의 소설로, 당신들의 그림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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