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시인 백호 임제의 시혼(詩魂)
2020년 12월 07일(월) 07:45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우석대 석좌교수

회진현(會津縣)은 고려 때부터 나주(羅州)에 병합되어 지금은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라는 마을 이름으로 부르는 곳이다.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지만, 회진은 오래전부터 ‘시점’(詩店)이라는 별칭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시인들이 모여 사는 ‘점방’, 끊임없이 시인들이 태어나 명성을 날리면서 시인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에는 어떤 시인들이 모여 살았을까. 본디 그 마을은 나주 임씨의 본고장이다. 나주 임씨는 집성촌이 회진이어서 ‘회진 임씨’라고도 세상에 널리 알려졌는데, 그 가문에서 많은 시인들이 배출되었다.

회진 임씨가 크게 알려지기는 기묘사화 때 태학생(太學生·성균관 학생)으로 소수(疏首)가 되어 정암 조광조를 구출하려 했던 귀래정(歸來亭) 임붕(林鵬·1486~1553)이 문과 급제자로 중앙 무대에서 활동하던 때부터였다. 귀래정은 시문에도 뛰어났지만, 한림·옥당을 거쳐 승지와 경주부윤 및 광주목사 등의 화려한 벼슬을 지내고 기묘명현이라는 절의를 지킨 인물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둘째 아들 풍암 임복은 문과에 급제했으나 벼슬보다는 강호에 묻혀 살면서 일생을 시인으로 살아갔으니 회진의 ‘시점’은 그분에서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풍암의 아우 절도사 임진은 무인으로 큰 이름을 얻었는데 임진의 아들이 바로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였다. 시인 풍암은 바로 백호의 중부(仲父)였으니 백호의 시는 바로 중부로부터 이어졌다고 여겨진다.

백호는 형제 네 사람이 모두 시인들이었으며 아들 4형제 또한 호걸스러운 시인들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더구나 중부 풍암의 아들 석촌 임서는 백호의 종제(從弟)로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고관인데 시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더구나 백호의 아우 습정 임환은 김천일 장군과 함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면서 시인으로 큰 이름을 얻었다. 이만하면 한 마을에서 배출한 시인들 때문에 그 마을을 ‘시점’으로 부르기에 넉넉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1988년 2월 광주일보에서 간행하는 월간지 ‘예향’에 ‘모순의 세속(世俗). 풍류와 자주의식’이라는 제목으로 ‘백호 임제론’을 게재하였으며, 바로 이어서 출간한 ‘다산기행’(茶山紀行)(한길사)이라는 저서에도 그 글을 실어 천재 시인 백호를 세상에 널리 알린 바 있다. 이제 그 책을 다시 펴 보며 백호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니 감개무량한 생각이 든다. 그해 연초의 혹한을 무릅쓰고 회진 마을 백호 유적지를 답사하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임씨들의 종산(宗山)인 신걸산에 올라가 백호 선생 묘소에 참배하던 때의 기억이 새롭다.

조선왕조 16세기 후반은 사림들이 정치적 승리를 얻어 내고, 예교(禮敎)와 성리학의 토착화 및 체계화로 사대부 사회가 맞이했던 문화적 전성기였다. 그러나 그 시기에 벌써 사대부 사회와 문화의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났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동서붕당이 일어나고 역옥(逆獄)이 이어지면서 부패한 관료들의 가렴주구가 이어졌다. 이윽고 왕조정권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임진·병자 변란을 겪게 되는 비운의 시대가 오고 말았다. 유교라는 강고한 틀로 명교사회(名敎社會)가 굳어지면서 사대부 사회의 유규(儒規)와 예교가 자아나 주체의식의 상실을 초래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삶이 질곡에 빠지면서 그러한 내부의 모순을 깊은 관찰로 대처하려 했던 올바른 지식인이 나올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 천재적 지식인 백호는 문과에 급제한 기득권자로 세속에 순응하고 예교에 따른다면 장래가 보장된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 법규에 그냥 따르거나 세속에 순응할 수 없었다. 뛰어난 시인 정신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결코 ‘기기’(奇氣)를 버리지 못했다. 모순의 세속에 저항하고 허위와 가식의 가짜 지식인들의 행태에 동조할 수가 없어, 그는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고, 풍류의 시심을 키우며 전형적인 시인의 세계에 빠지고 말았다.

비록 39세라는 짧은 생애로 요절하고 말았지만, 그의 풍류정신과 자주의식을 볼 때 아우 임환이 의병장이 되고 동시대 선후배 시인들인 고경명·양대박 등 탁월한 시인들이 임진왜란의 의병대장이 되었던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기생집이나 술집에서 시를 지으며 날을 새우던 그의 시인 기질은, 가난한 백성들을 잊지 못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걱정하는 시혼으로 승화되어 호남이라는 의향(義鄕)의 뿌리를 심어 주는 자주의식의 바탕이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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