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예속, 자기보존 욕망에 대한 태도
2020년 11월 23일(월) 00:00 가가
여전히 욕망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하지만 욕망하지 않고 인간은 살 수 없다는 생각 또한 자연스럽다. 욕망을 자기보존의 조건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선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욕망을 삶의 원동력이며, 자기보존을 위한 것으로 보는 태도는 자칫 무조건적인 욕망의 충족 능력에 대한 맹신을 초래하기 쉽다. 여기에서 욕망은 충족되어야 할 것이며, 충족 후에는 다시 새로운 욕망을 좇는 악순환이 구조화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욕망의 충족 능력이 미덕이 되고 무능력은 악덕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태도가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각자가 앞세우는 자기보존 욕망이 과도해질 때 공동체의 삶은 더 이상 삶을 보존하거나 유지하지 못하면서 삶은 야만과 자기모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자기보존 욕망은 항상 지성적 반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기보존 욕망을 철학의 주제로 끌어올린 철학자로는 범신론을 말한 베네딕투스 스피노자(1632-1677)가 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스피노자는 삶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이 지니는 가치를 흔들림 없이 드러낸다. 철학과 삶, 앎과 실천, 사유와 행동 그리고 관념과 실제 사이에 놓인 쉽게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두려움 없이, 겸손하게 하나로 합일함으로써 지성의 힘과 자유의 가치를 말한다.
스피노자에게 인간의 본질은 욕망 그 자체다. 누구나 자신을 보존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며 이 욕망은 감정과 이성을 다 포함한다.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다. 욕망은 곧 인간이며 삶의 동력이기에 감정과 이성, 정신과 몸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동안 어두운 지하에 족쇄를 채워 두었던 욕망을 세상 밖으로 해방시킨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철학을 해방시킨 ‘철학의 그리스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욕망은 동물성의 증거이자 수치이며 죄의 근원이었다. 당시의 눈으로 보면 스피노자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고 범죄자인 탓에 유대인 공동체에서 아예 영구 추방되는 벌을 받았다. 누구도 스피노자와는 말을 해서도 안 되고, 말을 들어서도 안 되며, 그의 책을 읽는 것도 금지되었다. 스피노자에게는 오직 한 가지, 잠잘 때마저도 끊임없이 ‘저주당하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이후 그는 바뤼히 스피노자에서 베네딕투스 스피노자로 이름을 바꾸고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수 자리를 거절한 채 평생 안경 렌즈를 닦으며 살았다. 교수 자리를 거절하는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저를 움직이는 것은, 좀 더 나은 지위에 대한 열망이 아닙니다. 평안에 대한 사랑이 저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스피노자는 구속 대신 자유를 통해서 자기를 보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성적 성찰이 없는 자기보존 욕망은 다른 이름으로 위장돼서 표출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성의 힘을 빌릴 때 욕망의 실체는 애써 ‘멈추지 않고도’ 쉽게 드러난다. 화려하고 현란한 말 잔치 사이에 숨겨진 우월의식과 자기최면에 걸린 숭고한 사명감이 그 특징이다. 자신들의 앎과 삶이 뒤섞인 ‘퍼포먼스’를 통해서 서로에게 예속을 요구하는 것을 스피노자는 ‘허영을 위한 예속’이라고 말한다.
수동적인 감정은 우리를 작아지게 하며 관계를 해체하게 하는 감정이다. 구도자와 연예인의 야누스 얼굴로 대중의 구원에 나서고, 통찰 없는 궤변으로 계몽자의 권력을 탐하며, 정치적 수사를 의미 없이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이들이 본래의 자리에 그냥 그대로 있었다면 모두를 위해서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다시 묻게 된다. 이 예속의 상태는 어떻게 가능한가? 스피노자는 우리가 미신에 자주 빠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신은 자유라는 더 큰 완전성으로 나가는 지성이나 이성과는 반대의 길이다. 수동적인 감정과 복종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미신이 생겨나고 예속이 일어난다. 자유와 예속의 거리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혼동하기 쉽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삶 그 자체로서의 자기보존 욕망은 자유와 예속이라는 두 갈래 길을 내민다. 그리고 선택은 항상 우리의 몫이다.
욕망을 삶의 원동력이며, 자기보존을 위한 것으로 보는 태도는 자칫 무조건적인 욕망의 충족 능력에 대한 맹신을 초래하기 쉽다. 여기에서 욕망은 충족되어야 할 것이며, 충족 후에는 다시 새로운 욕망을 좇는 악순환이 구조화된다.
전통적으로 욕망은 동물성의 증거이자 수치이며 죄의 근원이었다. 당시의 눈으로 보면 스피노자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고 범죄자인 탓에 유대인 공동체에서 아예 영구 추방되는 벌을 받았다. 누구도 스피노자와는 말을 해서도 안 되고, 말을 들어서도 안 되며, 그의 책을 읽는 것도 금지되었다. 스피노자에게는 오직 한 가지, 잠잘 때마저도 끊임없이 ‘저주당하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이후 그는 바뤼히 스피노자에서 베네딕투스 스피노자로 이름을 바꾸고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수 자리를 거절한 채 평생 안경 렌즈를 닦으며 살았다. 교수 자리를 거절하는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저를 움직이는 것은, 좀 더 나은 지위에 대한 열망이 아닙니다. 평안에 대한 사랑이 저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스피노자는 구속 대신 자유를 통해서 자기를 보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성적 성찰이 없는 자기보존 욕망은 다른 이름으로 위장돼서 표출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성의 힘을 빌릴 때 욕망의 실체는 애써 ‘멈추지 않고도’ 쉽게 드러난다. 화려하고 현란한 말 잔치 사이에 숨겨진 우월의식과 자기최면에 걸린 숭고한 사명감이 그 특징이다. 자신들의 앎과 삶이 뒤섞인 ‘퍼포먼스’를 통해서 서로에게 예속을 요구하는 것을 스피노자는 ‘허영을 위한 예속’이라고 말한다.
수동적인 감정은 우리를 작아지게 하며 관계를 해체하게 하는 감정이다. 구도자와 연예인의 야누스 얼굴로 대중의 구원에 나서고, 통찰 없는 궤변으로 계몽자의 권력을 탐하며, 정치적 수사를 의미 없이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이들이 본래의 자리에 그냥 그대로 있었다면 모두를 위해서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다시 묻게 된다. 이 예속의 상태는 어떻게 가능한가? 스피노자는 우리가 미신에 자주 빠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신은 자유라는 더 큰 완전성으로 나가는 지성이나 이성과는 반대의 길이다. 수동적인 감정과 복종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미신이 생겨나고 예속이 일어난다. 자유와 예속의 거리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혼동하기 쉽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삶 그 자체로서의 자기보존 욕망은 자유와 예속이라는 두 갈래 길을 내민다. 그리고 선택은 항상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