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우의 위로
2020년 11월 05일(목) 06:00
느릿느릿 걸어 나온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일흔네 살의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시작하자 객석은 정적에 휩싸였다. ‘어린이의 정경’ 등 슈만의 곡으로만 레퍼토리를 짠 이날 연주는 화려한 기교나 격렬한 타건(打鍵) 대신, 깊은 울림과 감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건드렸다.

마지막으로 ‘유령변주곡’을 끝내고, 건반에서 손을 뗀 그는 피아노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객석도 함께 숨죽였던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듯했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은 후 관객을 향해 박수를 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날 공연은 독주회로는 드물게 앙코르도 없었다. 두 시간 동안 다른 세상에 있다 온 기분이 들었고, 연주회의 여운은 오래오래 남았다. 열 살의 나이에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하며 데뷔한 후 64년간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했던 그다. 이날 연주를 들으며 그를 왜 ‘건반 위의 구도자’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떠올랐다. 아마도 이날 공연장에 왔던 많은 이들이 그랬을 터다. 결혼 후 45년 동안 항상 ‘함께’였던 아내 윤정희는 언제부턴가 연주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는 알려진 대로 알츠하이머와 싸우고 있다. 이창동 감독의 ‘시’(2010)에서 치매 앓는 노인 ‘미자’ 역을 연기하기도 했던 그녀는 촬영 당시 이미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그녀의 투병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전했다. 전남여고 후배인 지인은 40여 년 전 모교를 방문한 윤 씨와 찍었던 사진을 SNS에 올리고 그녀의 쾌유를 기원하기도 했다.

백건우 씨는 최근 인터뷰에서 “살면서 ‘정말로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바로 음악과 함께 있을 때였다”고 말했다. 어쩌면 장인과 소송까지 벌이며 클라라와의 사랑을 쟁취했지만 정신병으로 환청에 시달리고, 라인강에 투신하고, 자청해 정신병원으로 들어가 생을 마친 슈만도 ‘음악’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코로나19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이 드는 가을날, 이제 우리가 그의 연주를 통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다.

/김미은 문화부장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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