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5현의 한 분 유희춘
2020년 10월 12일(월) 00:00 가가
글 잘하고 경학(經學)에 밝아 학자로서도 유명했지만 ‘미암일기’(眉巖日記)라는 책으로 더 많이 알려진 미암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호남의 5현(五賢) 즉 다섯 분의 대표적 학자 중 한 분이었다. 미암은 ‘표해록’(漂海錄)으로 세상에 크게 알려진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외손자로, 형님 유성춘(柳成春)과 연달아 문과에 급제한 명문의 후손이었다. 해남 출신이었지만 담양에서 벼슬을 했고, 말년에는 담양에서 살았기 때문에 종가도 담양에 있으며, 후손들도 담양에 남아 담양 사람이 되었다.
한말 지사(志士)이자 시인이며 역사가였던 매천 황현(黃玹)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호남의 선비들이 호남 출신 학자 중에서 대표적인 5인을 골라 나라에 상소하여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주장한 다섯 분의 현인을 일러 ‘호남 5현’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태인의 일재(一齋) 이항(李恒), 해남의 유희춘, 광주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나주의 사암(思菴) 박순(朴淳), 남원의 옥계(玉溪) 노진(盧▲)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오래전에 문묘에 배향되었기 때문에 빠졌지만 본디는 호남 육군자(六君子)라고 호칭했었다. 여기에서 하서는 빠지고 한말까지 ‘5현’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있었다.
5현은 호남 출신이어서 ‘호남 5현’이라고 부르지, 실제로 그분들은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던 학자들로, 모두가 크게 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분들이었다. 다만 옥계 노진은 경상도 함양 출신이었지만, 그곳은 전라도와 경계 지역이었다. 또 처가가 남원이었고, 하서·미암·고봉·일재 등과 막역하게 지낸 학우들이었으며, 남원부사·담양부사·전주부윤 등 전라도에서 벼슬을 살았다. 실제로 남원에서 살기도 했기 때문에 남원에 서원이 세워지고, 후손들도 남원에 거주하여 전라도 학자로 부르게 되었다.
유희춘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으나, 오래지 않아 1549년 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무려 19년이 넘는 오랜 귀양살이를 겪어야 했다.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피해자로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긴긴 유배살이를 당했던 의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긴긴 세월은 미암을 대학자로 키워 주었으며, 많은 저술을 남겨 유학에 큰 공을 세운 학자가 되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유배에서 풀려 벼슬살이에 다시 오르는데, 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 고관의 지위에 오르고, 말년에는 예조·공조·이조의 참판에 임명되는 등 재신(宰臣)의 높은 벼슬에 오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관인 유희춘보다는 학자 유희춘에 더 적합했으며 외조부 금남의 학문을 이었다. 젊어서는 하서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뒷날에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 들어가 학자로서의 넉넉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미암선생집’(眉巖先生集)이라는 문집을 읽어 보면, 그런 대학자의 학문적 업적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다는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한말에 문집을 간행할 때 서문을 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편찬한 책이 매우 많지만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編纂甚富 而多不傳)며 “잡문은 대부분 흩어지고 없어졌다”(雜文大抵散일)라고 말해 학문적 업적이 전해지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 숙종 때의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는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손자로 당대의 학자였는데, 그도 그의 글에서 미암의 학문을 매우 높게 평가하면서 귀중한 학문적 문자가 전해지지 않는다는 한탄을 말하기도 하였다.
학자로 대접받는 가장 명예로운 일은 죽은 뒤에 임금이 내려주는 시호(諡號)에 ‘문’(文)이라는 글자를 받는 일이요, 최후의 명예는 선비들의 추대와 나라의 허가로 문묘에 배향되는 일이다. 우리 호남에서 문묘에 배향된 분은 유일하게 하서 김인후 뿐이다. 하서의 시호는 문정(文正)이었으며, 이항은 문경(文敬), 박순은 문충(文忠), 기대승은 문헌(文憲), 노진은 문효(文孝), 미암은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으로 나라 전체에서도 학자로서 높이 숭앙을 받아야 할 학자에 올랐음을 여기에서 알게 된다.
비록 문묘에 배향되지는 못했어도 미암의 높은 학문에 대하여 당대의 학자들은 모두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율곡(栗谷)·하서(河西) 등 미암의 학문을 칭찬하지 않는 학자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미암의 제자 하곡(荷谷) 허봉(許▲)은 판서에 오른 분으로 허균(許筠)의 형이었는데, 미암의 행장과 시장(諡狀)을 저술해 미암의 일생과 학문적 업적을 소상하게 말애 주고 있다. 미암의 부인 덕봉(德峯) 송씨(宋氏) 또한 여류 문인으로 유명했다. 그런 대학자 미암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척되어 호남학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유희춘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으나, 오래지 않아 1549년 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무려 19년이 넘는 오랜 귀양살이를 겪어야 했다.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피해자로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긴긴 유배살이를 당했던 의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긴긴 세월은 미암을 대학자로 키워 주었으며, 많은 저술을 남겨 유학에 큰 공을 세운 학자가 되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유배에서 풀려 벼슬살이에 다시 오르는데, 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 고관의 지위에 오르고, 말년에는 예조·공조·이조의 참판에 임명되는 등 재신(宰臣)의 높은 벼슬에 오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관인 유희춘보다는 학자 유희춘에 더 적합했으며 외조부 금남의 학문을 이었다. 젊어서는 하서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뒷날에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 들어가 학자로서의 넉넉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미암선생집’(眉巖先生集)이라는 문집을 읽어 보면, 그런 대학자의 학문적 업적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다는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한말에 문집을 간행할 때 서문을 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편찬한 책이 매우 많지만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編纂甚富 而多不傳)며 “잡문은 대부분 흩어지고 없어졌다”(雜文大抵散일)라고 말해 학문적 업적이 전해지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 숙종 때의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는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손자로 당대의 학자였는데, 그도 그의 글에서 미암의 학문을 매우 높게 평가하면서 귀중한 학문적 문자가 전해지지 않는다는 한탄을 말하기도 하였다.
학자로 대접받는 가장 명예로운 일은 죽은 뒤에 임금이 내려주는 시호(諡號)에 ‘문’(文)이라는 글자를 받는 일이요, 최후의 명예는 선비들의 추대와 나라의 허가로 문묘에 배향되는 일이다. 우리 호남에서 문묘에 배향된 분은 유일하게 하서 김인후 뿐이다. 하서의 시호는 문정(文正)이었으며, 이항은 문경(文敬), 박순은 문충(文忠), 기대승은 문헌(文憲), 노진은 문효(文孝), 미암은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으로 나라 전체에서도 학자로서 높이 숭앙을 받아야 할 학자에 올랐음을 여기에서 알게 된다.
비록 문묘에 배향되지는 못했어도 미암의 높은 학문에 대하여 당대의 학자들은 모두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율곡(栗谷)·하서(河西) 등 미암의 학문을 칭찬하지 않는 학자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미암의 제자 하곡(荷谷) 허봉(許▲)은 판서에 오른 분으로 허균(許筠)의 형이었는데, 미암의 행장과 시장(諡狀)을 저술해 미암의 일생과 학문적 업적을 소상하게 말애 주고 있다. 미암의 부인 덕봉(德峯) 송씨(宋氏) 또한 여류 문인으로 유명했다. 그런 대학자 미암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척되어 호남학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