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에 대한 담담한 이야기
2020년 09월 10일(목) 18:25
홍상수 감독 신작 ‘도망친 여자’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김민희와 일곱번째 작품

영화 ‘도망친 여자’의 한 장면

소규모로 다작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자기 색깔, 혹은 자기 복제라는 정반대의 같은 평가를 오간다.

스물네번째 장편이자 연인 김민희와 함께 한 일곱 번째 작품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감독상)을 받은 ‘도망친 여자’는 이전의 작품들과 여전히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진 듯하다.

주인공 감희(김민희)는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영순(서영화)과 수영(송선미)의 집을 잇달아 방문한다. 홀로 찾은 작은 영화관에서는 그곳에서 일하는 우진(김새벽)을 우연히 만난다.

이혼 후 외진 동네에 집을 산 영순은 텃밭을 가꾸고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살고 있고, 예술가들이 많이 산다는 동네에 새로 이사 온 수영은 그 예술가들이 모인다는 술집에서 이런저런 인연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우진은 오랜만에 만난 감희에게 과거의 일을 사과하고, 유명해진 남편의 흉을 본다.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주인공보다는 세 친구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영화처럼 이어진다. 감희는 친구들이 차려준 음식을 먹고 감탄하고, 친구와 친구 주변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반응한다.

자신에 대해서는 남편과 결혼한 뒤 5년 동안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고, 남편은 ‘사랑하는 사람은 무조건 붙어있어야 한다’고 했다는 이야기만 세 친구에게 반복한다.

여자 친구들의 대화는 30∼40대 여성들이 편한 친구와 흔히 나누는 생활의 이야기들이다. 마주 앉은 테이블에는 외국 관객들에게 ‘비밀을 털어놓게 하는 마법의 녹색 병’으로 인식된 소주 대신, 막걸리나 화이트 와인 한 병이 놓인 게 전부다.

홍상수 영화에서 빠지지 않았던, 허세 가득하거나 치졸하거나 느물거리는 남자들이 소주병을 앞에 놓고 허황한 대화를 하거나 젊은 여자에게 아름답다며 노골적으로 추근대는 장면도 없다.

평화로운 여자들의 시간을 한 번씩 깨뜨리는 남자들은 여전히 뻔뻔하고 치졸하지만, 뒷모습만으로 잠시 등장한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영순에게 “도둑고양이한테 밥 안 주면 안 되냐”고 요구하는 이웃 남자나, 술집에서 만나 한 번 잔 수영에게 수시로 전화하고 찾아와 “왜 수치심을 주냐”고 징징대는 젊은 남자 시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자들은 점잖은 말로 타이르거나, 목소리를 높여 남자들을 쫓아 보낸다.

약속하지 않은 우진과의 우연한 만남은 유일하게 어색한 순간이고, 우진과 헤어진 뒤 마지막 짧은 순간이 긴장을 만든다.

우진의 사과는 감희와 인연이 있었던 현재 우진의 남편 정 선생(권해효) 때문인 듯하고, 시종 단순하고 천진했던 감희는 다른 행사로 영화관에 와 있던 정 선생을 마주치고 얼굴이 굳어진다.

영화에서 ‘도망쳤다’고 언급되는 건 영순의 이웃집 여자뿐이지만, 마지막 순간 홀로 남은 감희의 표정에서 주인공의 시간을 반추하기 시작하게 된다. 17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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