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와 헤밍웨이
2020년 08월 27일(목) 00:00
‘전방위 예술가’. 아티스트 이자람(41)을 보면 떠오르는 단어다. 어릴 적,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달려가면 너 말고 네 아범”하고 노래하던 ‘꼬마’는 지금 인디그룹 ‘아마도이자람밴드’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뮤지컬 ‘서편제’에서 주인공 송화 역으로 열연을 펼치기도 했다.

이 씨는 서울대 국악과 대학원을 거쳐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송순섭 선생을 사사한 정통 소리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녀의 이름을 알린 건 일련의 창작 판소리였다. 이 씨는 지난 2007년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과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판소리로 재구성한 ‘사천가’와 ‘억척가’로 국내외에서 화제를 모았다. 국내 문학 작품도 아닌, 해외 문학을 판소리로 만들다니. 틀을 깨는 신선한 시도가 궁금해 ‘필견 리스트’에 넣어두기는 했지만 인터넷의 ‘짧은 영상’ 외에는 좀처럼 접할 기회가 없었다.

며칠 전 이 씨의 창작 판소리를 ‘드디어’ 관람했다. 이번에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였다. 망망대해에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고, 애써 잡은 고기가 상어떼에게 뜯겨 먹히는 장면을 바라보는, ‘노인의 외로운 싸움’을 판소리로 만나는 경험은 특별했다. 주인공 산티아고의 늠름한 모습을 노래할 때, 고단한 싸움을 마치고 배 갑판에 널부러져 잠을 청하는 산티아고를 묘사할 때, 청새치에 날카로운 작살을 꽂을 때, 소년 니꼴과의 우정을 이야기할 때,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그녀는 한편의 서사시를 만들어 냈다. 직접 대본을 쓰고, 작창을 해 120분간 사람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며 소리를 이어가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무엇보다 멀게만 느껴졌던 판소리가 내게 말을 건네는 ‘행복한 순간’을 만난 기쁨이 컸다.

광주·전남은 ‘소리의 본향’으로 불린다. ‘정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점점 잊혀져 가는 ‘판소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멋진 시도들을 우리 지역 젊은 소리꾼들에게서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졌다. 정해진 건 없지만 지금 셰익스피어의 희곡집과 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는 광주일보 인터뷰를 접하니,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김미은 문화부장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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