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과 균형발전
2020년 08월 20일(목) 00:00
‘호남’(湖南)이라는 명칭이 공식 기록에 등장한 것은 13세기 중엽부터다. 1018년(고려 현종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전라도’라는 지명이 있었음에도 별도의 명칭을 사용하게 된 계기는 불분명하다. 영남·관서·관동 등의 명칭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2873회(2243건의 기사) 언급되는데, 유람이나 명승지 소개 등에 주로 쓰였다.

주요 농수산물의 산지이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하는 호남의 중요성은 조선을 침탈한 세계 열강들도 잘 알고 있었다. 1896년 프랑스 휘브릴사가 서울∼목포 간 경목선 부설권을 조선에 요구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철도 건설의 시초다. 일본·영국에서도 호남선 부설을 요구해 오자 대한제국은 1898년 8월 호남선은 직접 건설하겠다는 의지의 결정체인 ‘호남선관설안’(湖南線官設案)을 의결했다.

그러나 대한제국과 조선인 유지 등의 호남선 부설 노력은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어 강제 병합을 서두르던 일제는 본토와 가까운 영남권과 수도권을 잇는 경부선 공사를 1905년 마무리했다. 수도권 및 영남권 중심의 개발과 성장, 호남권의 소외와 낙후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국가와 민자의 집중투자로 수도권과 영남권의 경쟁력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수도권으로 사람·물자가 지나치게 집중되고 그 부작용이 이슈로 부상하자 이번에는 수도권과 인접한 충청권이 혜택을 보고 있다. 수도권에서 가장 먼 호남은 또 한 번 설움과 좌절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호남의 인구는 반토막이 났고, 쇠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약의 계기를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가 균형 발전은 기존 불균형에 대한 시정 없이 현재의 관점에서 기계적으로, 오로지 수도권과 가까운 지역을 중심으로 추진된 것이다.

19세기 말 호남선 건설의 좌초, 그리고 일제에 의한 경부선 개통과 함께 110여 년간 이어진 호남의 쇠락은 효율과 성장을 우선한 과거 정부의 불균형 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묵묵히 이를 감내해 온 호남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국가 균형 발전이다.

/윤현석 정치부 부장 chadol@kwangju.co.kr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