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풍추상
2020년 08월 12일(수) 00:00
‘채근담’에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란 말이 나온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줄여서 ‘춘풍추상’(春風秋霜)이라고 한다.

고(故) 신영복 교수는 ‘담론’이란 책에서 자신이 체험한 춘풍추상의 사례를 소개한다. 대전교도소 수감 시절, 화장실이 따로 없어 임시 변소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문짝과 문틀이 맞지 않아 문을 여닫을 때 소리가 크게 났다. 그래서 소리에 민감한 야간에는 더 조심해야 했는데, 어떤 젊은 친구가 매일 밤 요란하게 화장실을 이용해 원성을 사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청년은 감옥에 오기 전에 사고로 다리를 다쳤고, 변소에 쭈그려 앉아서는 문을 조용히 닫을 수 없는 속사정이 있었다. 신 교수가 “왜 그런 사정을 미리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없이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사정을 구구절절 얘기하느냐”며 “그냥 욕먹고 사는 거지”라고 답했다. 신 교수는 이 일을 계기로 남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타인의 행동을 보면서 불가피한 사연을 헤아리게 됐다고 한다. 비로소 ‘춘풍추상’의 의미를 실천하게 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2월 청와대 비서관실에 신 교수가 쓴 ‘춘풍추상’ 액자를 선물했다. 임기 2년차를 맞아 초심을 잃지 말자는 취지였다. 이 액자는 원래 신 교수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선물했던 것인데, 문 대통령이 이 글귀를 좋아해 어렵게 사본을 구해 선물한 것이다. 이후 ‘춘풍추상’은 문재인 정부를 대표하는 모토가 됐다. 노영민 비서실장은 지난해 1월 취임 당시 이 액자를 가리키면서 비서진들과 다짐을 했고, 추미애 법무부장관도 지난 3일 신임 검사 임관식에서 춘풍추상을 강조했다.

요즘 현 정부 관료들이 춘풍추상의 정신을 지키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부동산 처분 대신 직을 버리는 행태에 춘풍추상이 아니라 ‘내로남불’ 아니냐며 비난하기도 한다. 지도층에 필요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톨레랑스’(관용의 정신) 아닐까.

/장필수 제2사회부장 bungy@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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