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과 무등산
2020년 07월 20일(월) 00:00 가가
무등산, 이제는 국립공원이다, 한국의 명산이요 호남의 명승이며, 광주의 자랑스러운 진산(鎭山)이다. 광주의 위대함이나 자랑스러움은 진산인 무등산의 영기(靈氣)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유신독재로 온 국민이 탄압의 사슬에서 고통을 당하던, 지역 차별의 이중적 불행을 겪던 70년대 중반, 민족시인이자 저항시인이던 광주의 아들 조태일 시인은 무등산을 새로운 역사 창조의 모태라 읊은 적이 있다. “찬바람 속에서도 광주는 / 큰 애를 뱄다더라 / 찬 눈에 덮여서도 무등산은 / 그렇게도 우람한 만삭이더라/”(‘겨울소식’)
시인은 스스로 이 시를 해석한 글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불과 몇 년 뒤에 일어나는 5·18 광주항쟁에 대한 예언적인 시였노라고. 호남의 위대한 새 역사 창조의 모티브는 대체로 무등의 신령스러운 기운에서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70년대 중반, 무등산은 큰 애를 만삭의 몸으로 안고 있다가, 끝내는 5·18 피를 뿌리며 출산했으니 오랜 군부독재를 물리치는 역사 창조의 용트림이었다. 조국의 민주화를 이룩해 낸 혁명적 창조 행위였다.
250년 전 다산 정약용은 아버지가 화순현감으로 부임하자, 가족들과 함께 2년 가까이 화순 생활을 보냈다. 16~17세이던 1778년 전후의 시기였다. 15세에 결혼했으니 성년이지만 실제로는 소년 시절이었다. 특히 17세의 가을, 무등산 일대의 아름다운 명승지를 대부분 탐방하고, 참으로 아름답고 멋진 시와 기행문을 남겼다. 그 시절의 호남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 자연경관을 지니고 있었던가를 알게 해 준다.
화순 만연사 곁의 ‘동림사(東林寺)’라는 절에서 형제들이 독서하며 토론했던 시와 기행문이 있고, 화순 동복의 적벽강과 물염정(勿染亭)을 관람한 시와 기행문이 있다. 서석산(무등산)을 등산하고 읊었던 시와 기행문도 남겼다. 동림사에서 독서하면서 읊었던 세 편의 시와 세 편의 기행문은 10대 소년 다산이 호남의 자연과 사람들의 의혼을 체험하고 알아낸 귀중한 자료다.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라는 제목의 글에서 서석산의 다른 이름인 ‘무등산’ 정기(精氣)가 얼마나 장엄했던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 무등산 정기의 공화(功化)로 위대한 조선의 역사가 창조되고 있었음을 은근한 내용으로 암시해 준다. “우뚝한 모습은 마치 거인(巨人)과 위사(位士)가 말하지도 웃지도 아니하고 조정에 앉아 비록 움직이는 흔적을 볼 수 없으니, 그의 공화는 사물에 널리 비치는 것 같다.”(屹然若巨人偉士 不言不笑 坐於廟堂之上 雖不見其施爲動作之跡 而其功化之及物廣矣) ‘웃지도 말하지도 않으면서도 역사가 가야 할 방향을 올바르게 가르쳐 주고 있는 산이 바로 무등산’이라는 사려 깊은 통찰이다.
산에 올라 읊은 시에는 “올라오려 할 때는 까마득하더니/ 멀리 오자 산하가 낮게 깔렸네/ 모난 행실이야 바로 탄로나지만/ 지극한 덕이야 가려서 분별하기 어렵다네(至德闇難別)”라고 말하여 등급을 매길 수 없이(無等) 아름답고 높은 무등산이 지극한 덕을 지니고 역사를 이끌어간다는 뜻을 말하기도 했다. 역사 창조의 동력을 지닌 산실일 뿐만 아니라 산 자체가 얼마나 높고 아름다운 산인가도 다산은 정확히 말했다.
기행문에서 그는 “굉장히 높은 산이다. 가운데 봉우리의 정상에 서면 날 듯한 기분이 들고, 세상을 가볍게 보고 혼자서 특별히 다른 길을 가는 기분이 들어, 인생의 고락(苦樂)은 마음에 둘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라고 표현했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을 느끼게 되어, 속세의 번잡한 생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괴롭거나 즐겁거나 삶의 아픔 같은 것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뜻을 담았다.
다산은 서울과 화순을 오고 가던 소년 시절, 광주를 두 번째로 지나면서 ‘중과광주’(重過光州)라는 시를 읊은 적도 있다. 그 시에서도 조선의 명장(名將)이자 큰 인물이던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이 무등산의 정기로 태어났다고 읊었다. 참으로 훌륭한 의병대장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무등산이 낳은 일세의 영웅임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광주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큰 길이 금남로와 충장로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충장로의 명칭이 나왔고, 정충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금남로의 명칭이 나왔다. 무등산은 광주정신을 창조해 내는 정기이자 모태임이 틀림없다.
그런 무등산 정기의 공화(功化)로 위대한 조선의 역사가 창조되고 있었음을 은근한 내용으로 암시해 준다. “우뚝한 모습은 마치 거인(巨人)과 위사(位士)가 말하지도 웃지도 아니하고 조정에 앉아 비록 움직이는 흔적을 볼 수 없으니, 그의 공화는 사물에 널리 비치는 것 같다.”(屹然若巨人偉士 不言不笑 坐於廟堂之上 雖不見其施爲動作之跡 而其功化之及物廣矣) ‘웃지도 말하지도 않으면서도 역사가 가야 할 방향을 올바르게 가르쳐 주고 있는 산이 바로 무등산’이라는 사려 깊은 통찰이다.
산에 올라 읊은 시에는 “올라오려 할 때는 까마득하더니/ 멀리 오자 산하가 낮게 깔렸네/ 모난 행실이야 바로 탄로나지만/ 지극한 덕이야 가려서 분별하기 어렵다네(至德闇難別)”라고 말하여 등급을 매길 수 없이(無等) 아름답고 높은 무등산이 지극한 덕을 지니고 역사를 이끌어간다는 뜻을 말하기도 했다. 역사 창조의 동력을 지닌 산실일 뿐만 아니라 산 자체가 얼마나 높고 아름다운 산인가도 다산은 정확히 말했다.
기행문에서 그는 “굉장히 높은 산이다. 가운데 봉우리의 정상에 서면 날 듯한 기분이 들고, 세상을 가볍게 보고 혼자서 특별히 다른 길을 가는 기분이 들어, 인생의 고락(苦樂)은 마음에 둘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라고 표현했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을 느끼게 되어, 속세의 번잡한 생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괴롭거나 즐겁거나 삶의 아픔 같은 것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뜻을 담았다.
다산은 서울과 화순을 오고 가던 소년 시절, 광주를 두 번째로 지나면서 ‘중과광주’(重過光州)라는 시를 읊은 적도 있다. 그 시에서도 조선의 명장(名將)이자 큰 인물이던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이 무등산의 정기로 태어났다고 읊었다. 참으로 훌륭한 의병대장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무등산이 낳은 일세의 영웅임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광주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큰 길이 금남로와 충장로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충장로의 명칭이 나왔고, 정충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금남로의 명칭이 나왔다. 무등산은 광주정신을 창조해 내는 정기이자 모태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