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마주하는 고독으로의 초대
2020년 07월 06일(월) 00:00 가가
코로나19가 몰고 온 위기를 그런대로 넘기는 듯하더니 며칠 사이 일상이 다시 정지되었다. 마치 누군가 삶의 ‘코드’를 뽑아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문턱까지 다가선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당분간 문 닫아걸고 익숙한 모든 것과 ‘거리 두기’를 한다는 것은 말만큼 쉽지는 않다.
이런 때, 세상에서 나만 혼자라는 단절감과 외로움이 마치 독버섯처럼 증식한다.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들이 지워지거나 기껏해야 잠시 맡겨졌던 것이 아닐까 싶은 냉혹한 불안도 엄습한다. 하지만 느닷없이 닥쳐온 낯선 세상을 견뎌야 한다는 외로움과 고립감이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관점은 꽤 위안이 된다. 자신의 힘으로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수용해야 할 때 누구나 고립감과 더불어 외로움을 느낀다.
이 무겁고 어두운 감정을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철학자가 한나 아렌트(1906~1975)다. 아렌트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철학자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에게서 공부했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 자격 취득을 금지당했다. 이후 아렌트는 나치의 반유대인 정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59년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여성으로서 최초로 전임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아렌트의 철학에는 나치독일의 반유대주의 폭력적 역사와 자신이 겪은 끔찍한 경험이 켜켜이 녹아 있다.
아렌트는 우리가 ‘혼자’일 때 갖는 감정을 세 가지로 나눈다. 우선 고립감이다. 고립은 세상의 질서와 공적 영역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감정으로, 개인이 공적 존재로서 철저하게 배제된 상황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고립은 테러의 가장 비옥한 토양이며 고립은 그 자체가 전체주의의 예비단계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전체주의는 고립된 사람들이 드러내는 잘못된 충성심의 결과로 퍼져 나가는 재앙이다.
반면에 외로움은 소통과 공감의 부재로 인한 감정이다.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소외감은 물론이고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혼자라고 느낀다. 더 나아가 외로움은 타인은 물론 내면의 ‘나’마저 대화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자기부정의 감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외로움은 외적 고립과는 관계없이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 대화의 불가능 상태와 연결된다.
아렌트가 말하는 나와 또 다른 나의 객관적 분리의 어려움으로 스스로가 ‘나’의 동행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자아 상실의 토대 위에서 더 깊어지는 외로움은, 불합리하고 설명되지 않은 현실에 직면할 때 외면과 도피 쪽으로 쏠리기 쉽다.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에 즉흥적이고 일방적인 타인들의 판단에 휩쓸려서 소통이라고 믿으며 외로움을 떨치고자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혼자 있는 상태는 고독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고독은 외로움과 어떻게 다른가? 고독은 혼자이기를 스스로에게 요청하며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사유하는 실존적 삶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혼자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고독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독은 자신과 함께하며, 자신과 질문하고 대답함으로써, 한 개인이 삶의 주체로서 자기기만과 허상을 내려놓는 시간과 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독은 자아 부정을 극복하며 외로움에 굴복하지 않는 최선이라고 아렌트는 말한다.
즉 고독은 외로움이 두려워서 밖으로 향함으로써 왜곡되고 굴절되었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고 자신에게 회귀함으로써, 공동체 관계에서도 자신을 주체로서 정립하는 과정이다.
외로움은 스스로의 사유를 회피하고, 고독은 ‘나’를 타인들의 모습으로 대체하기를 거부하는 주체적 사유의 길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외로움이 성찰적 고독으로 변화되지 못할 때 전체주의가 뿌리를 내린다고 보았다. 이 전체주의는 비단 정치만이 아니고 삶의 모든 영역을 잠식한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고, 누구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 당분간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는 불가피할 것이다. 이에 따른 단절감과 외로움 또한 없을 수 없지만, 그러나 즉각적인 외로움에 매몰되지 않고 나 자신을 고독으로 초대할 수는 있다. 외로움과 그리 멀지 않은 고독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고, ‘나’는 항상 나와의 대화를 기다린다.
이 무겁고 어두운 감정을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철학자가 한나 아렌트(1906~1975)다. 아렌트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철학자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에게서 공부했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 자격 취득을 금지당했다. 이후 아렌트는 나치의 반유대인 정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59년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여성으로서 최초로 전임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아렌트의 철학에는 나치독일의 반유대주의 폭력적 역사와 자신이 겪은 끔찍한 경험이 켜켜이 녹아 있다.
아렌트가 말하는 나와 또 다른 나의 객관적 분리의 어려움으로 스스로가 ‘나’의 동행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자아 상실의 토대 위에서 더 깊어지는 외로움은, 불합리하고 설명되지 않은 현실에 직면할 때 외면과 도피 쪽으로 쏠리기 쉽다.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에 즉흥적이고 일방적인 타인들의 판단에 휩쓸려서 소통이라고 믿으며 외로움을 떨치고자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혼자 있는 상태는 고독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고독은 외로움과 어떻게 다른가? 고독은 혼자이기를 스스로에게 요청하며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사유하는 실존적 삶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혼자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고독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독은 자신과 함께하며, 자신과 질문하고 대답함으로써, 한 개인이 삶의 주체로서 자기기만과 허상을 내려놓는 시간과 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독은 자아 부정을 극복하며 외로움에 굴복하지 않는 최선이라고 아렌트는 말한다.
즉 고독은 외로움이 두려워서 밖으로 향함으로써 왜곡되고 굴절되었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고 자신에게 회귀함으로써, 공동체 관계에서도 자신을 주체로서 정립하는 과정이다.
외로움은 스스로의 사유를 회피하고, 고독은 ‘나’를 타인들의 모습으로 대체하기를 거부하는 주체적 사유의 길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외로움이 성찰적 고독으로 변화되지 못할 때 전체주의가 뿌리를 내린다고 보았다. 이 전체주의는 비단 정치만이 아니고 삶의 모든 영역을 잠식한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고, 누구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 당분간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는 불가피할 것이다. 이에 따른 단절감과 외로움 또한 없을 수 없지만, 그러나 즉각적인 외로움에 매몰되지 않고 나 자신을 고독으로 초대할 수는 있다. 외로움과 그리 멀지 않은 고독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고, ‘나’는 항상 나와의 대화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