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재 박상의 시문학과 절의(節義)
2020년 06월 22일(월) 00:00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우석대 석좌교수]

1392년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되면서 유학(儒學) 그중에서도 성리학은 조선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글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유학을 배우고 시와 문장을 몸에 익혀야 선비로 대접받으며 지식인의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조선 초기 호남을 대표하던 고명한 유학자는 연촌 최덕지(1384~1455)와 불우헌 정극인(1401~1481)이었다. 이들은 15세기의 이름난 학자였으며,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까지의 대표적인 학자는 금남 최부(1454~1504)와 지지당 송흠(1459~1547)이었음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16세기 중반 이후 호남에는 나라를 대표하는 학자와 문인들이 무수히 배출되어 조선이 유교 국가로 자리 잡은 초석을 이룩했다.

찬란한 호남의 유학과 문학에 대한 자료는 지봉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교산 허균(1569~1618)의 ‘성소부부고’ 그리고 옥오재 송상기(1657~1723)의 ‘옥오재집’이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수광은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박학다식한 학자로 “근래에 조선의 시인은 대부분 호남에서 나왔다”라고 했다. 조선의 대표적 호남 시인으로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 석천 임억령, 금호 임형수,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사암 박순,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 백호 임제, 제봉 고경명 등을 상세하게 거명한 것이다.

허균은 위의 인물을 포함하여 호남의 뛰어난 학자와 문인으로, 눌재의 아우 육봉 박우(사암의 아버지), 신재 최산두, 나옹 유성춘, 미암 유희춘 형제, 학포 양팽손, 송재 나세찬, 면앙정 송순, 국재 오겸 등의 학문과 문장을 찬양하였다. 이조판서에 대제학을 지낸 송상기는 훨씬 뒷사람이지만 그 또한 호남의 학자와 문인으로 눌재·하서·석천·금호·사암·미암·고봉·일재·건재·제봉·옥봉·백호 등을 거명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성리학으로 명망과 덕행이 높고 절의와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들이라고 칭송하였다.

우리는 이 세 자료에 차이 없이 맨 앞에 거명된 인물이 다름 아닌 눌재 박상이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박상은 광주광역시 서창면 출신으로 아우 육봉 박우와 함께 호남의 대문호 석천 임억령을 길러 낸 대시인이자 학자였다. 육봉의 아들이자 눌재의 조카이며 시인·학자로 유명한 사암 박순은 영의정에 대제학을 지냈으니, 충주박씨 한 집안의 명성은 알아주지 않을 수 없는 명문이었다.

박상은 시인과 학자로서만 끝나는 인물이 아니었다. 강직하고 바른말 잘하던 기개 높은 선비였다. 하지만 문과에 급제하고 뒤늦게 문과 중시에 장원까지 했는데도 큰 벼슬에는 오르지 못했다. 장원급제로 통정대부의 위계에 올랐으나 전라도사·한산군수·임피현령·담양부사·순천부사·상주부사·충주목사·나주목사의 벼슬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가 담양부사 시절, 순창군수 김정과 무안현감 유옥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공동 명의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위한 상소를 올린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끝내 변방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는 벌을 받았지만, 그는 불의에 눈감지 않고 정의를 위해 죽음을 각오한 상소를 올렸던 정의감이 뛰어난 선비였다.

을사사화에 정의를 부르짖다 변방으로 귀양 가 죽음을 당한 금남 최부, 폐비를 반대하고 복위를 주장한 박상, 망국의 서러움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 매천 황현 등. 그들의 사상과 철학, 시인 정신은 바로 의(義)를 위해서는 언제나 앞장서서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호남정신의 형성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박상의 제자 석천 임억령은 무등산 원효계곡의 산자락에 식영정을 짓고 시문학을 호남인들에게 전파했다. 따라서 당대 시인이자 학자인 제봉 고경명, 건재 김천일, 충장공 김덕령 등이 임진왜란의 의병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일들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많은 고을에서 목민관 생활을 했지만 청백한 관리였으며 곧고 굳은 선비정신을 지녔기에 박상은 죽은 뒤에 대표적인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또 얼마 뒤에는 학문과 절의가 높은 학자들에게 내리는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연산군이 폐위되고 성종의 둘째이던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중종대왕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진성대군은 단경왕후에게 장가들었는데, 왕후는 정비이면서도 정비에 오르지 못해, 뜻있는 선비들은 복위를 주장했었다. 그러나 왕실의 사정상 그 일은 쉽지 않아 자칫 복위 주장을 하다가는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일 수도 있었다. 박상은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렸다. 그래서 뒷날 정암 조광조는 “1515년 상소에서 조선의 나라에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라고 찬양했다. 오늘날 순창의 ‘삼인대’(三印臺)는 박상·김정·유옥 등의 역사 숨결이 서려 있는 곳이다. 호남의 절의 정신은 이런 데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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