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폐기물 공론화 이대로는 안 된다
2020년 06월 02일(화) 00:00

[김종필 광주환경운동연합 사업국장]

대한민국 핵연료 폐기물(사용 후 핵연료) 관리 정책의 향방을 좌우할 공론화가 시작되었다. 지난 5월 23일 전국 각 시도 14곳에서 ‘사용 후 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이하 재검토위원회)가 사용 후 핵연료 관리 방안에 대한 전국 공론화를 시작하였다. 재검토위원회는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4월 17일부터 5월 1일에 걸쳐 전국 공론화에 참여할 시민 참여단을 모집하고 선정하였다.

국민 모두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실로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전국적인 의견 수렴이 시작되었지만 우리 국민 대부분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사용 후 핵연료가 도대체 무엇인지, 얼마나 위험한지,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왜 공론화를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어떤 홍보도, 여론 확산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전국 공론화를 시작한 것이다.

사용 후 핵연료라고 불리는 이 위험한 핵 쓰레기 문제는 아직까지 어떤 국가도 안전하게 처분할 방법과 처분장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인류가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이다. 10만 년 이상 생태계로부터 철저히 격리시켜 관리해야 하는 핵 쓰레기 문제에 대해 고작 2주 만에 시민 참여자를 모집하여, 각 권역별로 나누어 6일간 단 2회의 종합 토론회로 전국 의견 수렴을 진행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공론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 없다.

사실 ‘사용 후 핵연료 관리정책 공론화’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 초기에 ‘사용 후 핵연료 공론화위원회’가 운영된 바 있다. 하지만, 당시에 한쪽으로 치우친 공론화 위원 구성과 비민주적인 운영으로 20개월간 진행된 일방적인 공론화는 ‘그들만의 엉터리 공론화’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2016년 7월 원자력진흥위원회는 ‘고준위 방폐물 관리 기본계획(안)’을 심의·확정하였다.

이후 시민사회와 핵발전소 지역대책위 등은 박근혜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추진된 ‘사용 후 핵연료 공론화’의 부당성, 비민주성 등을 지적하며,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기본계획 철회 및 재공론화’ 주장하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사용 후 핵연료 정책 재검토’가 받아들여져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정책 재검토 준비단이 출범하였고, 재검토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다시 시작한 공론화도 박근혜 정부 때 진행된 공론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아 ‘가짜 공론화’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해 보인다.

핵연료 폐기물 관리 정책은 현세대 대다수 국민들과 특정할 수 없는 미래 세대의 삶뿐만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숱한 동·식물의 터전인 자연 환경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리고 기술적 불확실성과 위험의 장기성, 광범위한 영향과 피해 가능성, 이해관계의 복잡성 등으로 인해 기술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윤리적·사회적·경제적·정치외교적인 측면 등을 함께 심도 있게 고려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국, 핀란드, 스웨덴, 캐나다 등의 나라에서는 공론화 과정을 설계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으며, 논의 과정도 수십 년을 넘기기도 하였고, 심지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진행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업부와 재검토위원회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공론화를 중단하고 정부로부터 독립된 권위와 책임을 가진 전담 기구로서,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재공론화의 운영 주체를 재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핵연료 폐기물 문제에 대해 국민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교육, 홍보 등)가 마련되어야 하며, 핵연료 폐기물의 영향을 받는 직접적인 당사자인 다수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문제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복잡하고 다양하며 특별한 문제를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론화 주체들은 그 역할에 책임과 도덕성을 가지고 참여하면서 충분한 학습과 숙의적 토론을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론화 과정을 거친 결정이라 할지라도 치명적 문제점이 확인되었을 경우에는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려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짜 공론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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