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의거(義擧)와 어느 판사(判事)
2020년 05월 25일(월) 00:00 가가
5·18 40년! 며칠 전 우리는 광주의 아픔과 비극을 가슴에 안고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을 마쳤다. 30대 말의 팔팔한 장년이던 필자는 이제 70대 말 노령의 나이가 되었다. 그래 모든 것을 잊었지만,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으니 기록으로라도 남겨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일으킨 신군부의 무장 반란은 광주의 양민을 학살하는 일에서 시작했다. 권력욕에 눈이 먼 반란군들은 광주 시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광주 시민 수백 명이 죽고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수천 명이 구속되어 온갖 고문에 시달리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폭도이자 내란의 수괴, 주요 임무 종사자, 방조자 등의 죄명으로 징역 살던 그때의 일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나는 그때 반란군들의 조작으로 폭도들의 두목이 되어 죽음을 무릅쓴 도피 생활에 들어갔었다. 이런 과정에서 내가 잡히지 않아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해 준 의인(義人) 몇 분이 있으니, 그분들에 대해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란군들은 광주의거를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조작하여 내란죄라는 죄명으로 관련자들을 처벌해야만 자기들의 반란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내란죄 성립을 위해 수괴를 만들어 내고, 또 그에 종사한 사람들을 만들어야 했다.
모든 시민이 분노해서 주동자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항쟁에 무슨 수괴가 있고 종사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하므로, 수괴를 정해서 그를 처단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이때 상무대 법무관들을 통해 수괴로 조작할 대상자의 한 사람으로 내가 지목되고 있음을 알아낸 사람이 바로 광주지법에서 근무하고 있던 곽준흠 판사였다.
그때 젊은 곽 판사는 나와는 절친했던 후배로 나의 안위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던 차, 수괴로 지목된다는 정보를 입수해 동가숙서가식하던 나와 연락이 되었다. 거금을 준비한 그는 야밤에 내가 있던 곳으로 찾아와 돈을 건네며 즉각 광주를 탈출해 서울로 가야만 오랫동안 은신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탈출 방법까지 일러 주며 나의 생명을 구해 준 것이었다. 고급 승용차를 마련해 광주 탈출을 성공시켜 준 사람도 곽 판사였다.
5월 27일 도청을 다시 반란군이 장악하면서 광주는 온통 공포와 불만의 도가니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러던 때에 검거 선풍이 불고 폭도들은 자수하라고 온갖 선무공작이 한창이었다. 그 무렵, 6월 5일(토요일) 유람객의 모습으로 가장해 광주에서 곡성역으로 옮겨 서울행 기차를 타게 해 준 이가 바로 곽 판사였다.
광주 탈출의 과정에 또 한 분의 의인으로 지금은 고인이 된 이일행 선생의 힘이 컸지만, 그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언급하겠다. 나는 그때 곽 판사의 용감한 의기를 잊지 못한다. “자네 이러다 다치면 어떻게 하려는가?”라고 내가 말하자, “형님, 걱정 마세요, 형님이야 잡히면 죽지만 저야 문제가 생기면 판사 옷 벗고 변호사 개업하면 됩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호호탕탕 말하던 3년 차 젊은 판사의 당당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판사의 직위가 어떤 것인데, 헌신짝처럼 버려도 두려울 것 없다던 그의 의기,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가 마련해 준 도피 자금과 이일행 선생의 도움에 힘입어 7개월 이상을 무사히 숨어 살다가 결국 80년 연말에 검거되어 상무대 영창에 수감되었다. 내가 잡혀서 영창에 갇힌 며칠 뒤, 나를 면회 와 준 사람 또한 곽 판사였다. 가족도 면회가 안 되던 그때, 온갖 두려움과 무서움을 이기고 나를 보기 위해 와 준 그의 용기 또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곽 판사의 정보 입수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광주항쟁에는 주모자와 수괴가 있을 수 없다. 조작해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수괴로 만들어야 하는데, 내가 잡히지 않으니 이 사람 저 사람 거명하다가 끝내는 내 친구 정동년이 수괴로 변신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말았다. 5·17일 예비검속되어 5·18을 알지도 못한 정 수괴가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그런 난센스가 어디 있겠는가. 광주항쟁이 반란군들이 조작해 낸 폭동이자 내란이라는 사실을 바로 곽 판사의 정보가 가장 정확하게 웅변해 주고 있다.
부장판사로 퇴직하고 오랫동안 광주에서 변호사로 일한 곽 변호사는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몇 가지 암이 함께 번져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며칠 전 함께 점심을 하면서 옛일을 회고했지만, 완치가 어렵다는 그의 어두운 얼굴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5·18은 그렇게 광주 시민 모두가 함께 참여한 시민항쟁이었다.
나는 그때 반란군들의 조작으로 폭도들의 두목이 되어 죽음을 무릅쓴 도피 생활에 들어갔었다. 이런 과정에서 내가 잡히지 않아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해 준 의인(義人) 몇 분이 있으니, 그분들에 대해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란군들은 광주의거를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조작하여 내란죄라는 죄명으로 관련자들을 처벌해야만 자기들의 반란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내란죄 성립을 위해 수괴를 만들어 내고, 또 그에 종사한 사람들을 만들어야 했다.
5월 27일 도청을 다시 반란군이 장악하면서 광주는 온통 공포와 불만의 도가니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러던 때에 검거 선풍이 불고 폭도들은 자수하라고 온갖 선무공작이 한창이었다. 그 무렵, 6월 5일(토요일) 유람객의 모습으로 가장해 광주에서 곡성역으로 옮겨 서울행 기차를 타게 해 준 이가 바로 곽 판사였다.
광주 탈출의 과정에 또 한 분의 의인으로 지금은 고인이 된 이일행 선생의 힘이 컸지만, 그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언급하겠다. 나는 그때 곽 판사의 용감한 의기를 잊지 못한다. “자네 이러다 다치면 어떻게 하려는가?”라고 내가 말하자, “형님, 걱정 마세요, 형님이야 잡히면 죽지만 저야 문제가 생기면 판사 옷 벗고 변호사 개업하면 됩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호호탕탕 말하던 3년 차 젊은 판사의 당당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판사의 직위가 어떤 것인데, 헌신짝처럼 버려도 두려울 것 없다던 그의 의기,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가 마련해 준 도피 자금과 이일행 선생의 도움에 힘입어 7개월 이상을 무사히 숨어 살다가 결국 80년 연말에 검거되어 상무대 영창에 수감되었다. 내가 잡혀서 영창에 갇힌 며칠 뒤, 나를 면회 와 준 사람 또한 곽 판사였다. 가족도 면회가 안 되던 그때, 온갖 두려움과 무서움을 이기고 나를 보기 위해 와 준 그의 용기 또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곽 판사의 정보 입수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광주항쟁에는 주모자와 수괴가 있을 수 없다. 조작해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수괴로 만들어야 하는데, 내가 잡히지 않으니 이 사람 저 사람 거명하다가 끝내는 내 친구 정동년이 수괴로 변신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말았다. 5·17일 예비검속되어 5·18을 알지도 못한 정 수괴가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그런 난센스가 어디 있겠는가. 광주항쟁이 반란군들이 조작해 낸 폭동이자 내란이라는 사실을 바로 곽 판사의 정보가 가장 정확하게 웅변해 주고 있다.
부장판사로 퇴직하고 오랫동안 광주에서 변호사로 일한 곽 변호사는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몇 가지 암이 함께 번져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며칠 전 함께 점심을 하면서 옛일을 회고했지만, 완치가 어렵다는 그의 어두운 얼굴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5·18은 그렇게 광주 시민 모두가 함께 참여한 시민항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