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도청 사망 윤상원, 총상 사인→치명상 불명 자살로
2020년 05월 15일(금) 00:00 가가
김희송 교수가 말하는 5·18희생자가 주검으로 남긴 진실
(하) 검찰 검시조서·군 검시 기록이 남긴 의혹
27일 사망자 총상·자상 함께 발견
확인사살 등 무자비한 살육 반증
21일 집단발포 과정 사망 유영선
27일 광주YWCA 사망자로 조작
신군부, 이데올로기 공세 활용 의도
(하) 검찰 검시조서·군 검시 기록이 남긴 의혹
27일 사망자 총상·자상 함께 발견
확인사살 등 무자비한 살육 반증
21일 집단발포 과정 사망 유영선
27일 광주YWCA 사망자로 조작
신군부, 이데올로기 공세 활용 의도
박병규. 서호빈. 문용동. 이정연. 홍순권. 박진홍. 윤상원. 민병대. 문재학. 안종필. 박성룡. 유동운. 이강수. 김종연. 김동수. 박용준. 유영선...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과 광주YWCA에서 하늘의 별이 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5·18희생자들에게 큰 빚을 졌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부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4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27일 희생자들의 마지막 순간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검시조서를 통해 5월 27일 희생자들의 죽음의 진실과 군 작전의 성격을 파악해보자.
◇ 5월 27일 새벽의 참혹한 진실
27일 희생자들의 검시는 당일 오후 4시 30분부터 전남도청 구내와 후정에서 각각 실시되었다. 새벽 4시 시작한 이른바 상무충정작전이 오전 6시경 종결되었다는 점에서 27일 희생자들은 검시를 시작한 그 시간까지 검시장소 인근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만의 시간이었다.
27일의 검시는 사망자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박병규는 3-1번, 윤상원은 4-1번과 같이 사체 촬영 번호로 실시되었다. 검시장소에 따라서 도청 구내는 3-1번대, 도청 후정은 4-1번대의 번호를 부여했다. 검시장소의 차이는 희생자들의 사망장소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검시장소에 따라서 희생자들의 연령대와 사망원인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후 희생자들이 사망한 장소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광주YWCA 사망자로 분류된 박용준과 유영선의 검시는 5월 28일 상무관에서 실시되었다.
27일 도청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은 대부분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군의 검시참여 결과 보고서에 다발성 관통총상에 의한 사망이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군 작전이 대단히 공격적으로 진행되었다는 반증이다. 보안사가 ‘5월 27일 소탕작전 성공에 따른 효과’로 “국군 전 장병 특히 최초 진압에 피해를 입어 위축되었던 공수단 요원들의 사기 앙양과 전통 유지에 기여, 향후 유사 작전 수행시 지침서를 제공했다”고 평가한 사실은 27일의 희생자들이 왜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는지 그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는 비인도적 살인이 의심되는 검시 결과도 존재한다. 도청에서 사망한 윤상원과 광주YWCA에서 사망한 박용준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검에서는 자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총상과 자상이 같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총격 과정에서의 사망이라고만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80년 당시에는 항쟁지도부의 대변인으로, 사후에는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널리 알려진 윤상원의 검찰 검시조서에는 “우측 하복부 자상 및 하악골, 우흉복부 등 3도 화상(선단이 예리한 넓은 흉기로 방향은 전우좌-상방향으로 화상이 끝난 후 자상이 있고 그 뒤 탈장이 있는 듯함, 탈장된 부위는 직접 화상이 없으므로 화상이 직접 사인인 듯함)”이라고 기록했다. 반면에 군의 검시조서는 “전후흉부 3도 화상, 우측흉부누명상(어느 것이 치명상인가 여부 불명(자살인 듯))”이라면서 자살로 추정했다.
광주YWCA에서 사망한 박용준의 사망원인을 군 검시조서는‘안두부 관통총상’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검찰의 검시조서에는 ‘제1사인 안두부 관통총상 및 제2사인 자상(우측두부)’으로 기록되어 있다. 검찰의 검시조서에 따르면 머리에 총상과 자상이 함께 발생했으며 결정적 사인은 총상이라는 것이다. 총상과 자상이 같은 부위에 동시에 발생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자상과 총상이 어떤 선후의 순서로 발생했더라도 비인도적 살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검시조서의 내용이다.
<그림 1>의 11공수 전투상보와 같이 전일빌딩 점령 이후 도청의 3공수를 지원하기 위하여 이동하던 과정에서 광주YWCA에 있던 시민군의 총격을 받아 특공대원 2명이 부상을 당하고 도청 지원작전이 1시간 이상 지체되었다. YWCA 점령 후 군의 대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림 1>은 5월 27일 YWCA작전에서 2명을 사살했다고 기록했다.
1988년 광주청문회에 제출한 11공수 전투상보에는 YWCA작전에서 3명을 사살한 것으로 전과를 수정했다. 1985년 80위원회에 제출한 광주사태 변사체 검시보고서 요지에도 YWCA에서 박용준, 유영선, 염행열 등 3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했다. 군과 검찰의 검시기록에는 유영선이 5월 27일까지 최후 항쟁을 벌이다가 광주YWCA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YWCA사망자로 분류된 유영선의 경우 5월 21일 총상을 입고 기독교병원에 입원하여 사망한 것으로 병원 기록에서 확인된다.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 과정에서 피격되어 사망한 유영선을 27일 사망으로 조작한 계엄당국의 의도는 유영선의 검시조서에서 유추할 수 있다. 다른 5·18희생자들의 검시조서와 달리 유영선의 검시조서에는 유영선의 형이 안기부에서 수사받은 기록이 편철되어 있다. 유영선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가족의 안기부 수사기록이 편철된 것은 <그림 2>와 같이 5·18관련자를 방첩공작에 활용하라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5·18대응 지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보위 조사단은 1980년 6월 작성한 ‘광주사태 보고서’에서 5·18의 당면 대책으로‘악성 유언비어 해소, 민심 순화활동 강화, 불순분자 색출 발본, 유족 및 부상자 대책’등을 제시했다. 특히 불순분자 색출 발본의 방안으로는 “용공 불순분자 집중 색출공작, 난동 및 선동자 중 신원 특이자 중심 방첩공작 집중 *(판독 불가능)용, 김대중 사조직 색출로 근본적인 와해 조치”를 지시했다. 난동 및 선동자 중 신원 특이자 중심 방첩공작 집중은 5·18관련자 중에서 이른바 좌익활동이나 월북과 같은 신원 특이사항을 확인하여 정치공작에 활용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러한 국보위의 계획에 적합한 5·18희생자가 유영선이었다. 계엄당국은 좌익사범으로 수감된 가족을 탈옥시키기 위하여 유영선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영선은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 과정에서 피격 사망하였기에 계엄당국은 사망 일자와 장소를 조작했다. 유영선의 사례는 5·18희생자의 죽음까지도 이데올로기 공세로 활용한 전두환 신군부의 비열한 정치공작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5월 27일 광주진압작전의 진짜 목적
전두환 신군부는 당시 “광주유혈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으며, 특히 25일에는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태가 악화되어 선량한 시민의 보호가 급해짐에 따라 불가피하게 27일 작전을 전개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림 3>과 같이 1980년 5월 24일 작성된 보안사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전두환 신군부는 평화적 사태 해결에 대한 관심보다는 군부의 동향 특히 광주에서의 군사 반란을 걱정하고 있었다. 보안사는 정부의 특별한 조치 즉 신속한 진압작전을 전개하지 않을 경우 “전방에 있는 전남 출신 장병들의 전의의 상실과 광주에 주둔한 일부 전남 출신 장병들의 소극적 반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광주에서 여순사건처럼 진압거부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따라서 광주 진압작전의 명분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보안사의 이러한 제안은 실제로 5월 25일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방문으로 이어졌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나는 보안사령관 재임 시 그 어떤 작전지휘 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도 없다. 광주사태 기간 중 지휘관들의 모임 가운데 내가 유일하게 참석했던 모임인 5월 25일의 오찬은 작전계획과 관련 있는 모임이기는 했지만, 이미 계획이 확정된 뒤에 사후 설명을 위한 자리였다”며 자신은 5·18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림 4>의 ‘제5공화국 전사’는 5월 27일 작전의 명분을 수립하기 위하여 최규하 대통령까지 광주에 내려보내는 전두환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5월 27일 작전 또한 전두환 보안사에 의해 기획되고 실행된 것이다. 5·18에 관여한 바가 없으며 평화적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는 전두환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는 전두환 정권이 작성한 제5공화국 전사와 5·18희생자의 주검에서 확인된다.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5·18희생자들에게 큰 빚을 졌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부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4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27일 희생자들의 마지막 순간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검시조서를 통해 5월 27일 희생자들의 죽음의 진실과 군 작전의 성격을 파악해보자.
27일 희생자들의 검시는 당일 오후 4시 30분부터 전남도청 구내와 후정에서 각각 실시되었다. 새벽 4시 시작한 이른바 상무충정작전이 오전 6시경 종결되었다는 점에서 27일 희생자들은 검시를 시작한 그 시간까지 검시장소 인근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만의 시간이었다.
심지어는 비인도적 살인이 의심되는 검시 결과도 존재한다. 도청에서 사망한 윤상원과 광주YWCA에서 사망한 박용준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검에서는 자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총상과 자상이 같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총격 과정에서의 사망이라고만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80년 당시에는 항쟁지도부의 대변인으로, 사후에는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널리 알려진 윤상원의 검찰 검시조서에는 “우측 하복부 자상 및 하악골, 우흉복부 등 3도 화상(선단이 예리한 넓은 흉기로 방향은 전우좌-상방향으로 화상이 끝난 후 자상이 있고 그 뒤 탈장이 있는 듯함, 탈장된 부위는 직접 화상이 없으므로 화상이 직접 사인인 듯함)”이라고 기록했다. 반면에 군의 검시조서는 “전후흉부 3도 화상, 우측흉부누명상(어느 것이 치명상인가 여부 불명(자살인 듯))”이라면서 자살로 추정했다.
광주YWCA에서 사망한 박용준의 사망원인을 군 검시조서는‘안두부 관통총상’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검찰의 검시조서에는 ‘제1사인 안두부 관통총상 및 제2사인 자상(우측두부)’으로 기록되어 있다. 검찰의 검시조서에 따르면 머리에 총상과 자상이 함께 발생했으며 결정적 사인은 총상이라는 것이다. 총상과 자상이 같은 부위에 동시에 발생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자상과 총상이 어떤 선후의 순서로 발생했더라도 비인도적 살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검시조서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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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11공수 전투상보(YWCA작전) |
1988년 광주청문회에 제출한 11공수 전투상보에는 YWCA작전에서 3명을 사살한 것으로 전과를 수정했다. 1985년 80위원회에 제출한 광주사태 변사체 검시보고서 요지에도 YWCA에서 박용준, 유영선, 염행열 등 3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했다. 군과 검찰의 검시기록에는 유영선이 5월 27일까지 최후 항쟁을 벌이다가 광주YWCA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YWCA사망자로 분류된 유영선의 경우 5월 21일 총상을 입고 기독교병원에 입원하여 사망한 것으로 병원 기록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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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국보위 보고서(5·18관계자 정치공작 활용) |
국보위 조사단은 1980년 6월 작성한 ‘광주사태 보고서’에서 5·18의 당면 대책으로‘악성 유언비어 해소, 민심 순화활동 강화, 불순분자 색출 발본, 유족 및 부상자 대책’등을 제시했다. 특히 불순분자 색출 발본의 방안으로는 “용공 불순분자 집중 색출공작, 난동 및 선동자 중 신원 특이자 중심 방첩공작 집중 *(판독 불가능)용, 김대중 사조직 색출로 근본적인 와해 조치”를 지시했다. 난동 및 선동자 중 신원 특이자 중심 방첩공작 집중은 5·18관련자 중에서 이른바 좌익활동이나 월북과 같은 신원 특이사항을 확인하여 정치공작에 활용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러한 국보위의 계획에 적합한 5·18희생자가 유영선이었다. 계엄당국은 좌익사범으로 수감된 가족을 탈옥시키기 위하여 유영선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영선은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 과정에서 피격 사망하였기에 계엄당국은 사망 일자와 장소를 조작했다. 유영선의 사례는 5·18희생자의 죽음까지도 이데올로기 공세로 활용한 전두환 신군부의 비열한 정치공작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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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보안사보고서(군사 반란 우려) |
전두환 신군부는 당시 “광주유혈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으며, 특히 25일에는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태가 악화되어 선량한 시민의 보호가 급해짐에 따라 불가피하게 27일 작전을 전개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림 3>과 같이 1980년 5월 24일 작성된 보안사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전두환 신군부는 평화적 사태 해결에 대한 관심보다는 군부의 동향 특히 광주에서의 군사 반란을 걱정하고 있었다. 보안사는 정부의 특별한 조치 즉 신속한 진압작전을 전개하지 않을 경우 “전방에 있는 전남 출신 장병들의 전의의 상실과 광주에 주둔한 일부 전남 출신 장병들의 소극적 반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광주에서 여순사건처럼 진압거부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따라서 광주 진압작전의 명분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보안사의 이러한 제안은 실제로 5월 25일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방문으로 이어졌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나는 보안사령관 재임 시 그 어떤 작전지휘 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도 없다. 광주사태 기간 중 지휘관들의 모임 가운데 내가 유일하게 참석했던 모임인 5월 25일의 오찬은 작전계획과 관련 있는 모임이기는 했지만, 이미 계획이 확정된 뒤에 사후 설명을 위한 자리였다”며 자신은 5·18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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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5공전사(27일 작전) |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