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총상 사망자, 계엄군·검찰 검시 과정 타박상 사망으로 은폐
2020년 05월 13일(수) 00:00 가가
김희송 교수가 말하는 5·18희생자가 주검으로 남긴 진실 (상) 조작된 검시조서
전두환 정권 ‘80위원회’ 조직
폭압 논리 개발·군기록 재정리
총알 8발 관통·두개골 절상…
검찰도 공개 꺼린 참혹한 검시기록
방어적 차원의 주검 아닌
계엄군의 고의적, 악질적 살인
전두환 정권 ‘80위원회’ 조직
폭압 논리 개발·군기록 재정리
총알 8발 관통·두개골 절상…
검찰도 공개 꺼린 참혹한 검시기록
방어적 차원의 주검 아닌
계엄군의 고의적, 악질적 살인
40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5·18희생자의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많은 용기와 눈물이 필요하다.
5·18희생자로 호명되는 그들은 기실 그날의 아픔이 있기 전까지는 찬란한 생명으로 온 우주였으며, 누군가의 아들, 딸이거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권력 찬탈을 위하여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잔혹하게 파괴했다. 느닷없는 죽음의 안타까운 사연과 억울함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있다. 연구자로서 주검의 기록인 검시조서를 살펴보는 것은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5·18희생자의 주검을 통하여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아픔과 함께하고자 한다.
◇검찰도 공개를 두려워한 5·18희생자 검시기록
1985년 6월 5일 전두환 정권은‘광주사태 실상규명 관계장관 대책회의’를 개최하고 범정부차원의 실무조직으로‘80위원회’를 비밀리에 조직했다. 80위원회는 대학생들의 미 문화원 점거 사건 등으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5·18문제에 대한 정권차원의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80위원회는 계엄군의 폭압적 진압에 관한 대응 논리를 개발하고, 이에 맞추어 군 기록을 재정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림 1>과 같이 80위원회는 안기부 2국장을 위원장으로 내무부 2명, 문공부 2명, 보안사 2명, 육본 2명, 검찰 2명, 안기부 20명 등 정부 각 부처가 참여했다. 파견 인원의 규모에서 알 수 있듯이 80위원회는 안기부가 주도했다. 최근 일각에서 80위원회를 비롯하여 5·18왜곡 조직의 운영을 육군본부가 주도했다는 주장은 자료의 오독에 따른 견강부회에 불과하다.
80위원회의 내부 회의자료에서 주목할 부분은 기관별 수집 자료 목록에서‘사체부검 자료’에 대한 내용이다. 5·18사망자 관련하여 육군본부는‘사체 부검관련 기록’, 보안사와 법무부 대검은 ‘사체 부검관련 자료’의 수집을 지시했다. 80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광주지방검찰청은 1985년 6월 7일 ‘광주사태 변사체 검시 보고서 요지’라는 제목의 문서를 제출했다.
1980년 당시 검시업무를 담당했던 광주지방검찰청은 보고서와 함께 편철한 ‘5·18사망자 검시결과 검토 의견’에서 “사체의 형태가 페인트 칠을 하여 신원파악을 곤란케 하였으며, 잔인한 상흔이 많아서 검시조서를 국회에 제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했다.
특히 사체의 잔인한 상흔의 사례로 “8발의 총탄이 관통되어 사망, 19세 가량의 여자 유방이 칼에 찔린 후 2발의 엠-16총탄이 복부와 둔부에 맞아 사망, 대검 등 예기에 의한 우측 두정골 절상 및 망치 등 둔기에 의한 두부상에 의한 사망, 회음부 관통으로 인하여 사망, 전신타박상을 입은 후 총상에 의한 사망’등의 구체적 사례를 명기했다.
검찰은 5·18사망자의 사망원인에서 “타박사, 타박 후 칼로 여러 번 찌른 잔학상 시현, 두정골 함몰 후 엠16 총상, 후면의 총상, 전면 또는 두정골 자상”과 같은 사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인은 “방어적 살인이 아니라 고의적, 악질적 의도 나타냄”이라고 평가했다.
검찰의 이러한 평가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군부는 계엄군의 사격이 방어적 목적의 자위권 차원이라고 주장했지만, 검시 업무를 담당했던 검찰로서는 차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진실을 담고 있는 주검의 형태가 너무나 참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이 공개를 꺼린 5·18사망자의 검시조서는 1980년 당시 신군부의 주도하에 계엄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성한 문서였다. 신군부가 일방적으로 기록한 검시조서조차 공개하지 못할 정도로 주검의 진실은 형언할 수 없는 참혹함 이상이었다.
◇ 5월 19일 최초의 총상 사망자, 타박상 사망으로 조작한 검시조서=전두환 신군부는 5월 19일 총상으로 사망한 김안부의 사인을 타박상에 의한 사망으로 조작 은폐했다. 필자가 확인한 검찰의 검시조서에 따르면 김안부의 사망원인은 총상이었다. <그림 2>와 같이 검찰 검시조서의 사망진단서에는 ‘우전두부에 1×1cm의 사입구가 존재하고 맹관 총상이 인정됨’이라고 총상에 의한 사망으로 검시했다.
5월 19일 김안부가 총상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은 군이 작성한 ‘검시 참여 결과 보고서’에도 확인된다. <그림 3>과 같이 보안사가 보관하고 있는 검시 참여 결과 보고에도 김안부의 사망원인은 ‘두부 맹관상’이다. 검찰의 검시조서에 첨부된 사망진단서와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림 3>에서 알 수 있듯이 군은 치명상 부위를 ‘타박사’로 수정했다. 검찰 또한 최종 검시 결과에서는 <그림 4>처럼 타박사로 기록했다.
5·18민주화운동 최초의 총상 사망자로 기록되어야 할 김안부의 사망원인이 타박사로 조작된 이유는 사망 일자가 5월 19일로 명확했기 때문이다. 김안부의 최초 사망진단서를 발급한 광주 서부경찰서는 김안부가 “5월 19일 오후 10시 경 광주시 서2동 구 전남양조장 공터”에서 시위를 구경하다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광주 서부경찰서의 의뢰로 김안부를 검안한 서부경찰서 공의(公醫)는 사망원인으로 ‘앞머리의 광범위한 타박상’이라고 검시했다. 머리의 심한 손상의 원인을 총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5월 20일 최초의 검시를 할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군인이 국민을 상대로 총을 쏠 것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 시기였다. 5월 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로 수 많은 시민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차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5월 19일 시위를 구경하던 시민이 군인의 총에 맞아 사망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계엄당국에 의한 김안부의 2차 검시는 5월 28일 상무관에서 실시되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5·18사망자들의 검시를 철두철미하게 진행했다. 5월 27일 상무충정작전 직후에는 도청에서 사살한 이른바 ‘폭도’에 대한 검시를 먼저 실시했다. 5월 27이전의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는 5월 28일 상무관에서 이뤄졌다. 계엄당국이 주관한 검시에는 광주지방검찰청 검사, 군 법무관, 대학병원 의사, 군의관, 경찰, 군 수사관 등이 참여했다.
5월 27일과 28일 실시한 검시에서는 희생자의 구체적 인적사항을 확인하지 않고 사체 사진 촬영번호에 따라서 검시 기록을 먼저 작성한 후 나중에 신원이 확인되면 인적사항을 명기하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이런 연유로 5월 28일 상무관에서 실시한 김안부의 검시에서 계엄당국은 김안부의 사망진단서를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망 일자를 5월 21일로 추정했다. 머리에서 총상 흔적을 확인한 검안의는 앞서 언급한 내용과 같이 사망원인을 총상으로 분류했다.
5월 28일 검시 이후 광주 서부경찰서에서 발급한 김안부의 최초 사망진단서를 확인한 계엄당국은 김안부의 사망원인을 총상으로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5월 19일 총상 사망을 인정하면 전두환 신군부가 주장하는 자위권의 논거가 모두 부정되는 상황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신군부의 시기별 5·18분석에 따르면 19일은 소요의 초기단계인 단순 소요단계이다. 20일은 시민합세 단계, 21일부터는 폭도화 단계로 구분했다. 폭도화 단계에서 계엄군은 폭도들의 난동과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자위권적 사격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안부가 총상으로 사망한 5월 19일은 신군부 스스로도 큰 충돌이 없었던 단순 소요단계라는 점에서 김안부의 주검은 전두환 신군부가 주장하는 자위권 사격이 허구라는 것을 보여준다. 19일 김안부의 총상 사망, 20일 광주역 집단 발포,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까지 연이은 군의 사격은 5·18민주화운동의 성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증거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폭도들의 난동이 아니라 군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국가폭력의 현장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5·18희생자의 주검이 증명하고 있다.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
5·18희생자로 호명되는 그들은 기실 그날의 아픔이 있기 전까지는 찬란한 생명으로 온 우주였으며, 누군가의 아들, 딸이거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럼에도 5·18희생자의 주검을 통하여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아픔과 함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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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80위원회’ 구성표. 전두환 정권은 범정부치원의 ‘80위원회’를 만들어 5·18 대응 논리를 개발했다. |
80위원회의 내부 회의자료에서 주목할 부분은 기관별 수집 자료 목록에서‘사체부검 자료’에 대한 내용이다. 5·18사망자 관련하여 육군본부는‘사체 부검관련 기록’, 보안사와 법무부 대검은 ‘사체 부검관련 자료’의 수집을 지시했다. 80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광주지방검찰청은 1985년 6월 7일 ‘광주사태 변사체 검시 보고서 요지’라는 제목의 문서를 제출했다.
1980년 당시 검시업무를 담당했던 광주지방검찰청은 보고서와 함께 편철한 ‘5·18사망자 검시결과 검토 의견’에서 “사체의 형태가 페인트 칠을 하여 신원파악을 곤란케 하였으며, 잔인한 상흔이 많아서 검시조서를 국회에 제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했다.
특히 사체의 잔인한 상흔의 사례로 “8발의 총탄이 관통되어 사망, 19세 가량의 여자 유방이 칼에 찔린 후 2발의 엠-16총탄이 복부와 둔부에 맞아 사망, 대검 등 예기에 의한 우측 두정골 절상 및 망치 등 둔기에 의한 두부상에 의한 사망, 회음부 관통으로 인하여 사망, 전신타박상을 입은 후 총상에 의한 사망’등의 구체적 사례를 명기했다.
검찰은 5·18사망자의 사망원인에서 “타박사, 타박 후 칼로 여러 번 찌른 잔학상 시현, 두정골 함몰 후 엠16 총상, 후면의 총상, 전면 또는 두정골 자상”과 같은 사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인은 “방어적 살인이 아니라 고의적, 악질적 의도 나타냄”이라고 평가했다.
검찰의 이러한 평가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군부는 계엄군의 사격이 방어적 목적의 자위권 차원이라고 주장했지만, 검시 업무를 담당했던 검찰로서는 차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진실을 담고 있는 주검의 형태가 너무나 참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이 공개를 꺼린 5·18사망자의 검시조서는 1980년 당시 신군부의 주도하에 계엄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성한 문서였다. 신군부가 일방적으로 기록한 검시조서조차 공개하지 못할 정도로 주검의 진실은 형언할 수 없는 참혹함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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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고 김안부씨 검찰 사망진단서, 우전두부에 총상에 의한 사망이라고 쓰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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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고 김안부씨 검찰 사망진단서, 타박사로 수정돼 있다. |
5월 19일 김안부가 총상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은 군이 작성한 ‘검시 참여 결과 보고서’에도 확인된다. <그림 3>과 같이 보안사가 보관하고 있는 검시 참여 결과 보고에도 김안부의 사망원인은 ‘두부 맹관상’이다. 검찰의 검시조서에 첨부된 사망진단서와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림 3>에서 알 수 있듯이 군은 치명상 부위를 ‘타박사’로 수정했다. 검찰 또한 최종 검시 결과에서는 <그림 4>처럼 타박사로 기록했다.
5·18민주화운동 최초의 총상 사망자로 기록되어야 할 김안부의 사망원인이 타박사로 조작된 이유는 사망 일자가 5월 19일로 명확했기 때문이다. 김안부의 최초 사망진단서를 발급한 광주 서부경찰서는 김안부가 “5월 19일 오후 10시 경 광주시 서2동 구 전남양조장 공터”에서 시위를 구경하다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광주 서부경찰서의 의뢰로 김안부를 검안한 서부경찰서 공의(公醫)는 사망원인으로 ‘앞머리의 광범위한 타박상’이라고 검시했다. 머리의 심한 손상의 원인을 총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5월 20일 최초의 검시를 할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군인이 국민을 상대로 총을 쏠 것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 시기였다. 5월 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로 수 많은 시민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차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5월 19일 시위를 구경하던 시민이 군인의 총에 맞아 사망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계엄당국에 의한 김안부의 2차 검시는 5월 28일 상무관에서 실시되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5·18사망자들의 검시를 철두철미하게 진행했다. 5월 27일 상무충정작전 직후에는 도청에서 사살한 이른바 ‘폭도’에 대한 검시를 먼저 실시했다. 5월 27이전의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는 5월 28일 상무관에서 이뤄졌다. 계엄당국이 주관한 검시에는 광주지방검찰청 검사, 군 법무관, 대학병원 의사, 군의관, 경찰, 군 수사관 등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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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고 김안부씨 검시참여 보고서, 타박사로 기록되어 있다. |
5월 28일 검시 이후 광주 서부경찰서에서 발급한 김안부의 최초 사망진단서를 확인한 계엄당국은 김안부의 사망원인을 총상으로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5월 19일 총상 사망을 인정하면 전두환 신군부가 주장하는 자위권의 논거가 모두 부정되는 상황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신군부의 시기별 5·18분석에 따르면 19일은 소요의 초기단계인 단순 소요단계이다. 20일은 시민합세 단계, 21일부터는 폭도화 단계로 구분했다. 폭도화 단계에서 계엄군은 폭도들의 난동과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자위권적 사격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안부가 총상으로 사망한 5월 19일은 신군부 스스로도 큰 충돌이 없었던 단순 소요단계라는 점에서 김안부의 주검은 전두환 신군부가 주장하는 자위권 사격이 허구라는 것을 보여준다. 19일 김안부의 총상 사망, 20일 광주역 집단 발포,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까지 연이은 군의 사격은 5·18민주화운동의 성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증거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폭도들의 난동이 아니라 군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국가폭력의 현장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5·18희생자의 주검이 증명하고 있다.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