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을 품은 도시와 공간
2020년 01월 06일(월) 00:00

[이봉수 현대계획연구소 소장]

회색 양복을 빼입은 신사들이 어느 날 도시에 등장한다. 매일 숫자가 불어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들을 알아채지 못한다. 회색의 신사들은 “‘시간 절약’이나 ‘윤택해지는 삶’과 같은 포스터들을 사방에 붙이고, 도시 사람들을 하나둘 꼬드겨 시간 절약 거래를 체결하더니, 이윽고 도시를 장악해 버린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는 도시의 시공간을 뺏어 버린 회색 신사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시간 도둑’으로부터 모모가 도시 사람들을 구해 내는 독일의 동화이다.

도시의 모습은 차츰 변해 가는데, 불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되는 것은 모두 생략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살린 새로운 집들이 지어진다. 그 안에 살 사람들에 맞추어 집을 짓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자면 제각기 다른 모양의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모양의 집을 지으면 돈과 시간이 훨씬 적게 드는 이점이 있다. 다른 점이라고는 없는 고층 빌딩이 우뚝우뚝 솟아났다. 집들이 똑같아 보이니까 당연히 거리도 똑같아 보였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 주변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길거리를 조금만 걸어 보면 항상 비슷한 관상의 연예인 얼굴과 포스터들이 거리를 채운다. 여러 도시의 거리가 이렇게 존재감 없는 비슷비슷한 것들이 끊임없이 북적거리고 지나치는 공간으로 변모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광주다움과 같은 도시의 정체성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정체성은 영어의 ‘아이덴터티’(Identity)에 해당하는 말로 그 어원은 라틴어(Identitas, Identicus)로 ‘동일하다’는 뜻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도시 정체성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하나의 집단으로 보았을 경우에는 그 구성원 간의 공유되는 특징인 동일성이라는 측면이 있고, 하나의 개체로 보았을 경우에는 다른 개체와 구별되는 특성인 개별성의 측면이 있다. 동일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많은 것이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그 무엇은 변함이 없다는 연속성이며 나는 주위 사람과 환경에 잘 어울린다는 소속감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성은 ‘도시가 다른 도시와 다르다’ 혹은 ‘뛰어나다’ 등 특이성과 우월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도시 정체성은 다른 도시와 차별화되는 그 도시의 자기다움 즉 도시 내적 시각에서는 도시의 동일성, 그리고 도시 외적 시각에서는 도시의 개별성 내지 차별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도시 정체성은 도시의 역사·문화·사회·경제적 특성 등으로 형성되며, 도시 이미지를 형성하는 중요한 인자가 된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각각의 도시가 매우 큰 변화를 겪었다. 이로 인해 도시는 획일화 경향이 강하게 되었는데 모든 도시가 고속도로, 고층빌딩, 대규모 아파트단지, 광장 등의 공통 요소를 갖추고 이른바 일반 도시화 되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오천 년 한반도의 역사와 고유한 문화 및 선조들의 지혜에 대해 배우고 노래 부르곤 했지만 그 오랜 역사와 고유 문화 중 우리 도시 공간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얼마 없다. 이미 많은 전통 건축물이 무너졌고, 오래된 길목과 집들이 제거된 곳엔 새 길과 터널이 촘촘히 뚫리고 있다. 자본과 유행의 논리로 인해 정체성도 다양성도 결여된 도시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다.

정리하자면, 도시 정체성이란 어떤 도시가 다른 도시와 차별화되는 그 도시의 자기다움이며, 이러한 도시 정체성은 도시의 역사·문화·사회·경제적 특성 등으로 형성되고, 도시 이미지를 형성하는 중요한 인자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도시와 지역이 당연히 보유하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소홀히 되어 획일적이고 매력 없는 도시공간을 창출하여 왔기 때문에 이렇게 도시 정체성의 중요성이 지적되는 배경이 된다

우리는 확고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조금 더 의도적이고 사람 냄새 나는 도시와 공간을 종종 목격하게 되는데, 그 특별한 장소들은 뇌리에 깊이 박혀 매력적인 잔상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매력적인 도시와 공간이란 무엇일까? 살고 싶은 도시 1위인 호주 멜버른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녹지와 광장 그리고 이를 이어 주는 다양한 교통수단으로 인해 다양한 사람과 삶의 여건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환경을 마련해 도시를 채우는 삶들을 녹여낸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도시의 정체성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삶과 이야기가 있는 도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공간의 주인인 도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내가 사는 광주가 여러 사람들이 우연히 스치고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선 내 뇌리에 남아 있는 도시들에서처럼 평범함에 도전하고, 다양함을 상상하며 실험하는 것이 일상이 되기를 작게 희망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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