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정신’의 발화점, 학생독립운동
장재성 빵집·흥학관 복원 절실
논설실장·이사
거국적 항일투쟁 굴곡진 역사
2019년 10월 23일(수) 04:50
일제 강점기 ‘광주학생운동’에서 촉발된 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독립운동이자 민족운동으로 평가된다. 항쟁의 불길과 파급 효과가 비단 ‘광주’에만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9년 11월 3일 민족 차별과 식민지 노예 교육에 항거하는 광주 지역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투쟁은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남으로 목포와 나주에서, 북으로 함흥·회령까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당시 전체 학생의 절반이 넘는 5만4000여 명이 참여했으니 그야말로 거국적인 항일운동이었다.

북간도, 연해주, 일본 도쿄 등 해외에서도 만세 시위가 펼쳐졌다. 멕시코와 쿠바 등지의 한인들은 지지 집회를 열고 에네켄과 사탕수수 농장에서 땀 흘려 번 돈을 후원금으로 보냈다. 김재기 전남대 교수가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은 ‘광주학생운동이 침체된 독립운동을 진작시키고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 확보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생독립운동은 90년이 다 되도록 그 위상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일제가 식민 통치를 위해 그 진상(眞相)을 끊임없이 축소하고 왜곡하며 조작한 것이 근본 원인이 됐을 것이다. 나아가 광복 이후에도 부단한 연구와 참가자 증언 채록 등 학술 조사 및 규명 활동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해 내지 못한 후손들의 책임도 크다. 광주학생운동이 ‘댕기머리 사건’ 등 한일 학생들 사이에 우발적 충돌로 일어난 지역적 사건이라는 인식이 여전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역대 정부가 정권의 성향과 입맛에 따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을 굴절시키거나 억압한 것도 장애 요인이 되었다. 제정과 폐지·부활을 거듭하며 심한 부침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지난 1953년 국회에 의해 ‘학생의 날’로 지정됐지만 5·16 쿠데타 이후 군사 정부가 ‘반공학생의 날’을 강조하면서 한동안 두 개의 학생의 날이 병존하기도 했다. 급기야 1973년에는 모든 학생의 날이 폐지되고 말았다. 유신정권 붕괴 이후 부활 여론이 높아지면서 1984년 다시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고, 2006년에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명칭이 정립됐다. 교육청 차원의 소규모 지역 행사로 치러지던 기념식이 정부 주관으로 열린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었다.



거국적 항일투쟁 굴곡진 역사



그러다 보니 학생독립운동 90주년 기념일이 불과 열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그 불씨를 지폈던 광주는 물론 전국적으로 그 정신과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 계승하려는 움직임은 미약하기만 하다. 관련 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틀에 박힌 기념식과 기념사업은 대중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9일 (사)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국제 세미나는 그나마 의미가 있었다. 이날 100주년을 앞둔 과제로 ‘광주’라는 지역성의 극복을 통한 전국화, 해외 확산 상황 등에 대한 연구 강화, 참가자들의 독립 유공자 서훈 확대 등이 제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화 이전에 지역화 작업부터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광주에서조차 그날의 함성과 숨결을 느끼고 시위 상황을 체험할 수 있는 유적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참여 학교에 설치된 기념탑과 역사관, 광주시교육청이 운영하는 기념관이 사실상 전부다. 9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역사의 현장이 무관심과 홀대 속에 대부분 흔적도 없이 유실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최초의 한일 학생 충돌 지점인 수기동 우편소와 집단 충돌이 벌어진 광주역 옛터(현 동부소방서) 그리고 토교(현 대인시장 동문 입구)가 대표적이다. 또한 비밀결사와 동맹휴학 등 조직적 투쟁의 모체였던 독서회 및 소녀회가 모임을 가진 장재성 빵집도 사라졌다. 그 빵집 건물(현 금남로 공원)에는 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만든 학생소비조합과 김기권 문방구도 있었다고 한다. 장재성·왕재일·박인생 등이 최초의 학생 비밀결사 조직인 성진회(醒進會)를 결성한 최규창의 하숙집(불로동)이나 독서회중앙본부가 탄생한 김기권의 집(양림동)도 마찬가지다.

특히 3·1운동은 물론 광주학생운동 당시 청년 운동가들의 회합 장소이자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한 것으로 알려진 흥학관(興學館)은 신간회를 비롯한 수많은 민족운동 단체의 본거지이자 민족 교육의 요람이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이들 역사적 현장에 대한 면밀한 고증과 조사를 바탕으로 표지석을 설치하거나 사적지로 지정하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복원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공간에 대한 기억과 장소성을 되살려 시민과 학생들의 관심을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 유적이 광주 구도심 주변에 모여 있는 점을 고려하면 ‘학생독립운동 테마거리’ 조성도 검토해 볼 만하다. 민주화운동을 기리는 419·518·228번 버스처럼 이들 유적들을 경유하는 1103번(또는 113번) 시내버스를 운행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장재성 빵집·흥학관 복원 절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광주일고 내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 새겨진 스물네 글자처럼 광주학생운동은 최초로 학생이 주체가 되어 민족 독립의 의지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나아가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잉걸불이 됐다는 점에서 이른바 ‘광주 정신’의 발화점(發火點)으로 볼 수 있다. 민주·인권·평화, 나눔·연대·대동의 시민의식이 근대 학생운동에서 싹텄다는 사실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통해 지역의 정신적·문화적 가치를 풍요롭게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독립운동 주역들에 대한 인물사적 연구와 스토리텔링 작업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자라는 낙인 때문에 독립운동 유공자에도 포함되지 못한 장재성과 소녀회를 주도한 장매성 남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흡인력이 강한 스토리다. 또한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민족운동에 헌신하다 스러져 간 수많은 ‘이름 없는 별들’과 흥학관을 지어 청년들의 독립 정신을 고취한 ‘광주 최부자’ 최명구의 이야기도 ‘경주 최부자’에 못지않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학생독립운동의 전국화와 세계화 역시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논설실장·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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