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의 ‘맛있는 이야기’] 은행
2019년 09월 26일(목) 04:50
만약 은행나무가 없었다면 이 가을의 풍경은 얼마나 단조로웠을까. 엽록소의 생성이 활발한 여름까지는 거의 모든 나뭇잎이 초록색을 띈다. 그러다 엽록소의 생성이 더뎌지고 분해되는 가을이 되면 본색을 드러낸다. 숨죽여 지내던 색소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카로틴(오렌지색), 탄닌(갈색), 안토시아닌(붉은색)의 색소가 가을을 물들인다.

그런데 은행나무는 좀 유별나다. 은행잎에 포함된 크산토필 색소는 노란색이다. 더구나 분해 속도가 느려 다른 색소보다 훨씬 오랫동안 노란색을 유지한다. 심지어 바닥에 떨어진 후에도 며칠 동안은 건재하다. 강렬한 가을볕을 품으면 더욱 밝게 빛나 황금색을 띈다. 인간의 수명은 기껏해야 100년 남짓. 하지만 은행나무는 풍찬노숙을 하면서도 1천 년을 산다. 국가가 법률로서 지정하고 보호하는 천연기념물 가운데서도 은행나무는 월등히 많은 숫자를 차지한다. 무려 23그루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첫번째로 지정된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독보적이다. 높이 42m에 가슴둘레는 14m에 이른다. 수령은 무려 1100년을 헤아린다. 그러니까 이 은행나무는 삼국이 저물고 고려와 조선이 건국되고 숨 가쁘게 흘러온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지켜본 역사의 산증인이다. 은행나무는 공룡이 지구의 주인이던 중생대부터 존재했다. 무려 2억7000만 년 전부터 지구에서 살아왔다. 지축이 흔들리는 대혼돈의 시기와 가혹한 빙하기에도 어떠한 변종이나 분화 없이 꿋꿋하게 버텼다. 그래서 1문 1강 1목 1과 1속 1종만 존재하는 식물이다.

그런 은행나무가 요즘 한국에서 수난을 당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그 질긴 생명력에서 검증되었듯 병충해에 강하고 공기 정화 효과가 뛰어나다. 무엇보다 미세먼지와 차량이 내뿜는 오염물질인 아황산가스를 흡수하는 데 탁월한 기능을 가졌다. 도시마다 거리 곳곳에 가로수로 은행나무를 심었다. 애당초 은행나무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인간의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광주 시내에만 4만6000여 그루가 심어져 있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구별되는 나무며 암나무에만 열매가 열린다. 문제는 나무를 심은 지 최소 15년이 지나 열매가 열려야 비로소 암수를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은행나무 열매의 겉껍질에는 ‘빌로볼’과 ‘은행산’이라는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빌로볼과 은행산은 고약한 냄새를 내고 접촉성 피부염을 일으킨다. 이러한 독성물질은 종자를 보호하고 번식시키기 위한 은행나무의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도시인을 만났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지방자치단체에는 주민들의 민원이 폭주한다. 초기에는 환경미화원들이 열매를 수거했지만 역부족이었다. 2013년부터는 채 익지 않은 녹색 열매를 미리 수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멀쩡한 암나무를 뽑아내고 수나무를 심는 일도 벌어졌다. 급기야 은행잎으로 암수를 감별하는 DNA 분석법까지 개발됐다. 거대한 초식 공룡의 틈바구니와 빙하기도에도 건재했던 은행나무가 고작 인간의 불편함 때문에 속절없이 꺾이고 있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이렇게 몹쓸 짓을 하면서도 인간은, 은행(씨앗) 자체는 매우 좋아한다. ‘견과’는 딱딱한 껍질에 둘러싸인 식용 씨앗을 의미하다. 곡물과 콩 역시 식용 씨앗이지만 견과류와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견과는 대체로 크기가 크고, 기름이 풍부하며, 익히는 것만으로 맛과 영양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성질 덕분에 견과는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중요한 영양 공급원 역할을 했다. 은행, 호두, 헤이즐넛, 아몬드, 땅콩, 캐슈너트, 밤, 잣 등이 대표적이다.

모든 견과가 그렇듯 생명을 품은 씨앗이라는 속성상 단단한 껍질이라는 보호 장치를 갖고 있다. 오랜 세월 지구에서 버텨 온 은행은 그 보호 장치가 특히 견고하다. 고약한 냄새와 독성을 가진 외과피를 벗기면, 흰색의 단단한 중과피를 만난다. 이것을 은행이라고 한다. 단단한 중과피를 벗기면 다시 갈색피막의 내종피를 만나는데 이걸 벗겨야 비로소 한 알의 은행을 먹을 수 있다. 무려 3중의 보호막을 가졌다.

이처럼 견고하게 보호되는 씨앗은 그만큼 풍부한 영양분을 갖고 있다. 높은 칼로리와 베타카로틴, 비타민B와 C, 신경조직 성분인 레시틴 그리고 아연, 철, 칼륨, 칼슘, 인 등의 다양한 미네랄을 함유한다. 덕분에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노화를 예방하며 콜레스테롤 조절을 돕는다. 가을의 대표적인 식료인 은행은 살짝 볶아 소금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고소하고 농축된 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신선로나 찜 등의 요리에 단골 고명으로도 사용되었고 은행주악·은행단자(모두 떡의 일종) 등 품격 있는 한국 음식의 재료로 활용되어 왔다.

향기로운 것만이 대접받을 자격이 있는 건 아니다. 향기와 냄새는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 경계를 넘나든다. 가을만 되면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은행나무에게 미안해서 해 보는 소리다.

<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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