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는 왜 그랬을까
2019년 09월 23일(월) 04:50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법이 서로 충돌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한쪽을 불가피하게 선택하고 결과를 수용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운명을 좌우하는 결단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안티고네’라는 작품이다.

안티고네는 그리스 비극 중 가장 비극적인 주인공인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큰딸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끔찍한 죄에 대한 속죄를 위해서 스스로 두 눈을 찌른 후 나라 밖으로 떠난다. 이때 아버지를 따라나선 두 딸이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다. 오이디푸스가 통치하던 나라는 쌍둥이 아들 둘이서 교대로 왕위를 잇기로 하지만 왕권 투쟁을 벌이다가 서로를 죽이고, 외삼촌 크레온이 새로운 왕이 된다.

이때 오이디푸스 왕이 죽고 두 딸은 외삼촌이 왕인 테베로 돌아온다.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는 크레온이 내린 명령을 듣고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할 처지다.

크레온은 오이디푸스 왕권을 물려받은 두 조카들이 죽자 자신과 뜻을 같이 한 조카에게는 장례식을 허락하지만 다른 조카에게는 장례는커녕 최소한의 애도마저 금한다. 나라를 배신한 반역자라는 이유에서다. 왕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 ‘돌로 쳐서’ 죽여도 좋다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을 그대로 방치해서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할 수는 없다고 나선다. 그러니 동생 이스메네에게 어떻게든 오빠의 장례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스메네는 왕의 명령은 곧 법이고 법을 거스르는 것은 통치자의 권력에 맞서는 것이라면서 반대한다.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비참한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더 강한 자의 지배’에 순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살기 위해서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동생과 법이라고 해도 그 옳고 그름을 따져 봐야 할 뿐만 아니라 그저 목숨을 위해서 복종하는 것은 비열하다는 언니. 이 두 자매가 보여 주는 법에 대한 갈등은 수천 년 동안 되풀이되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사실 법의 선택이 아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이다. 그런데 안티고네는 왜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오빠의 장례를 고집하는가?

안티고네는 옳음의 길이 굴종의 삶을 사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항변한다. 안티고네는 ‘옳은 일을 하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우냐?’라고 역설한다. 왕이 내린 명령과 법은 인간의 법일 뿐이기 때문에 이보다 내면의 양심이 지시하는 것에 따르는 것이 정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안티고네는 단언한다. 안티고네에게 죽은 오빠의 장례는 단순히 가족만의 일이 아니다. 죽은 자를 마땅히 장례 지내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 윤리의 불문율을 지키는 것이다.

왕과 그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는 안티고네의 태도는 현실에서 권력의 힘으로 세운 인간의 법에 대한 비판이다. 보편적인 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이며, 세상의 어느 법보다 더 중하다고 안티고네는 말한다. 이런 이유에서 장례를 감행한 죄로 붙잡혀 온 안티고네는 자신의 행동을 당당하게 인정하며 왕의 법은, 신이 내린 법도 정의의 여신이 만든 법도 아니고, ‘한낱 인간에 불과한’자의 명령인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고 따진다.

안티고네가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만든 모순의 법, 이 법이 강요하는 삶의 비루함과 자기부정이다. 그래서 왕의 법이 정의의 법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의란 특정한 개인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또는 어떤 집단을 위한 ‘선택적’인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울타리가 없는 보편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레온의 법은 요즘 한참 회자되는 말로 ‘선택적 정의’ 즉 정의의 사유화인 셈이다. 특정한 이해관계에 따른 선택적 정의는 크레온의 법이 보여 주듯 배타적이고 기만적인 자기의식에서 뻗어 나와서 진정한 정의를 막아서는 ‘가면 쓴 정의’일 뿐이다. 안티고네가 인간의 법 대신 보편적인 정의의 법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보편적 법 선택에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의도가 교묘하게 위장된 세상의 소리가 시끄러울수록 밝은 귀로 내면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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