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야율덕광 후당·후진 멸망시킨 요나라 2대황제
2019년 08월 06일(화) 04:50

<초당대총장>

야율덕광(耶律德光, 902~947)은 요나라의 2대 황제인 태종이다. 오대의 후당과 후진을 멸망시켜 북방 지역의 강자로 부상했다. 947년 국호를 대거란국에서 대요로 개칭하였다.

902년 요 태조 야율아보기와 술률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요골이고 자는 덕근이다. 916년 야율아보기는 거란국의 황제가 되어 장남 야율배를 태자로 삼았다. 926년 야율아보기가 발해국을 친정하고 귀국 도중 길림의 부여성에서 병사하였다. 술률후가 나은 세 아들이 뒤를 이을 적자였다. 순리대로 하자면 장남인 야율배가 황제에 되어야 한다. 그는 중국 문화에 심취한 친중주의자였다. 유가문화를 존숭해 공자사당을 세워 제사드릴 것을 부친에게 건의하였다. 중국 문학에 심취했고 음악, 침술, 의약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한자로 시를 지을 정도로 문화 수준이 높았다. 특히 동양화에 일가견이 있었다. 반면에 야율덕광은 부친을 닮아 말과 활쏘기에 능했다. 전쟁 수행 능력도 뛰어났다. 유목 민족인 거란족의 지도자에 적합한 전형적 무인이었다. 리더십도 있고 사람을 잘 다루어 추종하는 부하들이 많았다. 막내는 야율이호인데 성품이 거친 범용한 인물이었다.

태조 사후 실권을 장악한 술률후는 무술과 지략을 중요시하였다. 거란의 황제는 뛰어난 무인의 기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찍이 야율아보기는 세 아들에게 장작을 패게 해 그 기질을 시험했다. 덕광이 가장 먼저 일을 완수했다고 한다. 장남은 마른 땔감만을 골라 돌아왔고 막내는 적당히 주워 담아 돌아왔다. 덕광이 일을 맡기면 빈틈없이 완수하는 능력을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술률후는 수도인 파림좌기에 도착해 여러 족장들에게 말하였다. “야율배와 야율덕광은 내가 모두 아끼는 자식이므로 당신들이 세울 만한 사람을 선택해 그의 말고삐를 잡아라.” 족장들이 덕광의 말고삐를 다투어 잡고 함성을 지르며 말하였다. “바라건대, 덕광 태자를 섬기겠습니다.” 이를 지켜본 술률후가 말하기를 “무리들이 바라는 바이니 내 어찌 감히 어기겠소.” 덕광을 옹립해 천황왕으로 삼았다. 술률후는 웅천황태후가 되었다. 형 야율배는 동단국왕에 봉해졌으나 동생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930년 후당에 몸을 의탁했다.

태종으로 즉위하자 한연휘를 재상으로 삼고 중원 정벌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후당의 절도사 석경당은 거란에 도움을 청해 후당을 멸망시키고 936년 후진을 건국했다. 석경당은 거란과 협약을 맺어 베이징 주변의 연운 16주를 할양하고 매년 비단 30만필을 보내며 야율덕광을 아버지로, 자신을 신하로 칭하였다. 938년 후진으로부터 연운 16주의 지도와 호적을 넘겨받았다. 942년 후진의 석경당이 죽자 제왕 석중귀가 뒤를 이었다. 온건파 풍도 대신 대거란 강경론자인 경연광이 정권을 장악했다. 후진은 거란에 대한 칭손은 가능하나 칭신(稱臣)은 할 수 없다며 단교를 통보했다. 격노한 태종은 남하를 결심해 이후 3년에 걸친 후진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947년 정월 후진의 수도 개봉에 입성했다. 경연광을 체포해 목졸라 죽이고 석중귀를 유폐하였다. 2월 초하루 천자가 쓰는 통천관을 쓰고 진홍색 옷을 입고 대요의 황제에 즉위하였다.

거란군은 기병을 중심으로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군대를 통솔해왔다. 이에 따라 각지에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동쪽 지방인 하남성 송, 안휘성 박, 산동성 민에서 도적떼가 일어나 정벌하느라 애를 먹었다. 태종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중국의 사람들이 이같이 통제하기 어려울 줄을 알지 못 하였다.” 결국 고국으로 회군키로 결정하고 후진의 백관을 불러 말하였다. “기후가 더워져 가니 나는 오래 머무를 수 없고 상경으로 가서 태후를 돌보려고 한다.” 태후의 오빠의 아들인 소한을 개봉절도사로 삼아 방비토록 하고 고향으로 회군하였는데 도중에 하북 난현에서 46세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태후는 “네가 한뼘의 땅을 얻어도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만약 뜻밖의 일이 생긴다면 크게 후회스러울 것이다”라고 예언한 바 있는데 그녀의 말대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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